[글로벌 문화 현장] 호수 위 7m 높이 카드로 '카르멘' 운명 점치다

서곡부터 빗방울이 호수에 듣기 시작하더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1막 중반 카르멘이 아리아 '하바네라'를 부르고 퇴장한 직후였다. 비 가릴 곳 없는 야외 6980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꿈쩍 않고 자리를 지켰다. 비옷을 둘러쓴 채 장대비와 맞선 관객들은 종교의식에 참여한 듯 경건했다.

지난 25일 밤 오스트리아 서쪽 콘스탄스 호수(독일명 보덴호)를 낀 소도시 브레겐츠. 72회를 맞은 브레겐츠 페스티벌 메인 공연인 비제 오페라 '카르멘'이 시작됐다. 호수 위 야외무대서 올린 '카르멘'은 시선부터 잡아챘다. 7m 높이 대형 카드 15장이 공중에 걸리는 등 같은 크기 카드 62장이 무대 이곳저곳에 깔렸다. 20m 높이 두 손이 카드를 펼친 듯 감쌌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 사이로 대형 담배까지 걸쳤다. 밋밋하게 보이던 카드에 영상과 조명이 더해지면서 변신이 시작됐다. 집시여인 카르멘(아날리사 스트로파)의 유혹에 넘어간 돈 호세(아널드 롤스)가 밀수범 패거리에 가담했다가 카르멘에게 버림받고 마지막 대결을 벌이는 장면까지 카드 위에 가수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미카엘라는 3막 밀수꾼들의 은신처를 찾아가면서 24m 높이에 걸린 카드 위로 기어올랐고, 곡예사들은 카드 사이를 줄을 타고 위태롭게 오르내렸다.

무대를 맡은 여성 디자이너 에스 데블린(46)은 아델과 U2 같은 팝스타들의 공연 무대를 꾸민 스타. 빈과 런던, 밀라노에서 오페라를 만든 데블린은 호수를 무대 삼아 펼치는 브레겐츠 페스티벌에 안성맞춤이었다. 런던 로열오페라의 오페라 감독인 연출가 카스퍼 홀텐(44)은 호수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1막 후반 카르멘은 호세의 도움으로 탈출하며 호수에 뛰어들었다. 3막 밀수꾼들의 합창은 모터보트를 타고 물 위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사랑을 거절당한 호세의 복수 장면 피날레도 호수가 사건 현장이었다. 호세는 카르멘을 호수 물에 빠뜨린 채 목을 졸랐다. 휴식 없이 2시간 동안 내달린 공연이 끝나자 성대한 만찬(晩餐)을 즐긴 듯 포만감이 밀려왔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호수라는 자연조건과 음악을 결합시켜 특급 문화상품으로 만들어낸 성공 사례다. 1946년 시작된 페스티벌은 인구 2만의 이 소도시를 여름 한 철 먹여 살리는 힘이다. 매년 여름 한 달간 20만명이 찾아온다. 브레겐츠는 물론 인근 도른비른, 린다우와 반경 50㎞ 이내 호텔이 동날 만큼 인기다. 아이디어 넘치는 대형 무대와 연주를 맡은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탄탄한 작품성이 무기다.

성악가들은 무선 마이크를 쓰지만 객석과 무대를 둘러싼 수백 대의 스피커로 뛰어난 소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게 페스티벌의 특징이다. 야외에서 고급 오디오로 음악 듣는 격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하지만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음향의 한계를 보완한 건 인정할 만하다. 지휘자 파올로 카리냐니(56)와 빈 심포니 단원들은 야외 객석과 맞닿은 1656석짜리 콘서트홀 안에서 연주했다. 야외무대 좌우에 설치한 대형 화면으로 빈 심포니와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 브레겐츠 페스티벌 합창단이 연주하는 모습이 중계됐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1985년부터 오페라 1편씩, 2년간 여름 시즌에 올리는 것을 정례화했다. 007 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에 소개된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200 7~2008년)는 페스티벌의 명성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지난 19일 개막한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이달 20일까지 28차례 '카르멘'을 공연한다. bregenzerfestspie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