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8.03 09:37

무더운 요즘 끈 하나 없이 어깨와 가슴, 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차림새를 심심찮게 만난다. 이른바 ‘오프 숄더(off shoulder)’ 패션이다. 고전영화 속의 빅토리아풍 드레스에서나, 외국 휴양지의 연예인들에서나 보다가 거리에서 마주치면 조금은 당황스럽다. 우리나라 여자들도 상체의 거의 반을 맨살로 내놓는 패션에 거리낌이 없어 보여 놀랍고, 행여 흘러내리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다, 새삼 내가 구닥다리가 된 기분마저 들어서다. 무엇보다 시선 처리에 순발력을 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때는 즉각 시선을 주지 않는 척한다. 실은 순식간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봐버리고서 말이다. 주위 남자들은 어찌 보고 있는가, 점검도 끝낸 후다. 이쯤 되면 ‘시선 기술’이 좀 있는 셈이랄까. 여자 대 여자의 경우에서나 가능한, 시선 대상과 얼추 비슷한 나이대거나 패션에 민감할수록 더욱 발달하는 기술일 수 있다. 저렇게도 입는구나. 유행인가? 음, 별로네. 어, 괜찮은데? 나도 한번 입어봐? 지난번 산 바지랑? 아냐, 그 치마랑 더 어울리겠어. 평가분석에 코디까지 이미 ‘동시 상영’됐다면 좀이 아니라 상당한 기술이랄까.

특히 여자보다 동시 상영에 약하다는 남자들이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다. 오프 숄더 여자가 지나갔을 때 남자들 시선에서 기술이 발휘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놓고 보는 남자, 가다가 뒤돌아 다시 보는 남자도 있었다. 어딘가 걸터앉은 남자는 고개를 찬찬히 돌려 여자를 좇으며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눈치였다. 눈길이 가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느끼하고 음험하게 느껴지는 나머지 민망하고도 소름을 돋게 하는 시선이라면, 더군다나 ‘몰카’까지 쓰기라도 한다면 문제다. 오죽하면 ‘시선 강간’이란 신조어까지 나타났으려고.

그런 자극적인 단어에는 못 미치더라도 ‘시선 강도’ 비슷한 경우는 이따금 만난다. 전철 안에서나 거리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그렇다. 대개 나보다 훨씬 연장자로 보이는 아줌마나 할머니의 시선이었다. 슬쩍도 아니고 왜 저리 막무가내로 본담? 언짢아질 정도에 이르면 내 나름의 대처법을 쓸 수밖에 없다. 눈만이 아니라 얼굴까지 돌려 상대를 정면으로 빤히 보는 것이다. 일종의 눈싸움 시작이다. 상대는 대부분 슬그머니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그래도 안 되면 목소리를 깔고 묻는다. “저 아세요?”

사진=조선일보DB
눈흘김(fleeting eye)

빤히 쳐다보는 그림을 그린 것만으로 비난을 받은 화가도 있다. 바로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그린 마네다. 알몸의 여자가 정장을 갖춰 입은 신사들과 풀밭에 앉아있는 그림이다. 음식 바구니 옆에는 지금 벗어놓았는지 하늘색 드레스가 보이고, 두 남자는 대화에 여념이 없다.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도 부도덕하건만, 뭘 보냐는 듯 뻔뻔하게 쏘아보는 여자의 시선은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네는 ‘음란 화가’란 지탄에 시달려야 했다.

차라리 빤히 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안 보는 척 다 봐버리는 내숭 기술을 터득지 못한, 어쩌면 순진한 시선이라고 이해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안 보는 척도 아니고, 보기는 보되 흰자위로 흘겨보는 것이야말로 섬뜩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다. 눈 흘김을 죄악으로 간주하던 시대도 있었다. 언젠가 두꺼운 서양 고전을 넘기다가 발견한 사실이다. 책 이름은 잊었지만, 눈 흘김을 영어로 ‘fleeting eye’라 표현했던 것과 조목조목 열거했던 그 죄악상은 기억에 선명하다.

중국 고전에는 ‘백안(白眼)’이 등장한다. ‘진서(晉書)’의 ‘완적전(阮籍傳)’에서 진나라 때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찾아오면 흰자위를 드러내고 흘겨봤다고 한다. 백안시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반대로 반가운 이는 검은 눈동자를 가운데로 한 호의적인 ‘청안(靑眼)’으로 대했다고 한다. 왜 흑(黑)이 아니고 청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거의 모든 사물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는 오행(五行)에 따라 계절로 동쪽은 봄, 서쪽은 가을, 색깔로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이기 때문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확대경 아래 전시됐던 기원전 3세기경 유리구슬에 눈이 크게 표현되어있다. 장신구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는 부적으로 서아시아 지역에서 애호됐다고 한다.
매너눈

점점 청안을 대하기가 쉽지 않아 간다. 사람은 도외시하는 대신 언제 어디서건 꼭 붙잡고 미소도 머금어주는 스마트폰에게 눈을 빼앗기고 있어서다. 하기야 거기에도 백안이 없진 않은 모양이다. 예를 들어 SNS 시대를 사는 요즘 아줌마들의 ‘공적(公敵)’은 돈 못 벌고 바람피우는 남편도, 못살게 구는 시댁도 아니고 나보다 잘사는 여자들이라서 이들에 대한 악플이 난무한다니 백안시에 다름 아니다. 눈앞에 없다고 해서 그러나? 그럼 바로 눈에 보이는 내 옆자리, 내 이웃, 아니 내 가족들에게 나는 어떤 시선이 잦은가. 백안시인가, 청안시인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조차 단 2분만 눈을 맞추고 있으면 호감도가 오르더란 연구결과들이 있다. 가까이 있는 이들, 더구나 한 지붕 아래 산다면 1분, 아니 그 반으로도 행복 호르몬을 솟게 하련만, 눈은 마주치지 않은 채 상투적인 말만 던지기 일쑤인 나다. 무더울수록 청안시가 아쉽다. 따스한 시선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차가운 백안시는 열을 받게 하니, 힘 안 들이고도 시선은 센 힘을 발휘한다. 센 것엔 매너가 필요한 법. TV 프로그램에서 여자에 대한 남자의 ‘매너손’을 칭찬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남녀 불문한 ‘매너눈’은 어떤가.

하지만 이 매너, 갖추기 애매할 때가 많다. 오프 숄더만 해도 아름다운 어깨를 드러내 보이고는 싶지만 뚫어져라 보는 건 싫다, 새 옷을 입었는데,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아무도 안 봐주면 서운하고, 너무 쳐다보면 기분 나쁘다. 겉만이 아닌 속까지 헤아리는 시선이라면 장애며 기형, 비만 등으로 힘든 이들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 없는 매너눈이 될 터이다. 마음이 보이는 창이라 눈도 마음마냥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시도 때도 없이 선글라스로 가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면, 늘 매너눈을 염두에 둬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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