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성적 조작 유혹에 빠진 아버지

"때로 인생에선 결과가 더 중요하단다. 너에게 늘 정직하라고 가르쳤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아. 그들의 무기로 싸워야 할 때도 있어."

오는 10일 개봉하는 루마니아 영화 '엘리자의 내일'(감독 크리스티안 문지우)에서 여고생 '엘리자'(마리아 빅토리아 드라구스)는 아침 등굣길에 폭행당한다. 다음 날 시험을 앞두고 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댄 딸의 모습을 보자 의사인 아버지 '로메오'(아드리안 티티에니)는 다급한 마음에 시험 성적 조작의 유혹에 빠져든다. 엘리자는 영국 명문대 두 곳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여기엔 '고교 졸업 시험을 잘 쳐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로메오는 결국 한밤중에 딸에게 "시험지 첫 장의 마지막 세 단어를 지워 놓으라"고 말한다. 성적 조작을 위한 암호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공동 감독상 수상작인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윤리적인 고민에 빠져 있다. 아버지 로메오는 과거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의 민주화를 열망했지만, 지금은 딸의 성공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소시민이다. 뇌압이 높은 노모(老母)는 화장실을 가던 도중에 쓰러지고, 아내 몰래 만나는 내연녀는 임신 소식을 알린다.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는 문제 앞에서 로메오는 탈출구를 잃고 난감한 처지가 되고 만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루마니아는 악명 높은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1989) 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연줄과 촌지, 부패가 기승을 부리는 사회다. 관료와 경찰, 의사들은 죄책감 없이 "서로 돕고 사는 것"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사건 해결을 청탁한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문지우(49)는 민주화 이후 루마니아의 '민낯'을 그 어떤 과장이나 윤색 없이 영화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낸다. 문지우는 2007년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잦은 장면 전환이 없다. 로메오의 승용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 외에는 음악도 절제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정적(靜的)이다. 영화는 일상적 문제들을 담담하게 보여주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치열하고 정치적이다.

작품의 루마니아어 원제는 대입 자격시험을 뜻하는 '바칼로레아(Bacalaureat)'다. 과연 딸은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영국 유학을 떠날 수 있을까. 영화는 낙관적 기대에서 자꾸만 빗나가고, 속 시원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지금은 잊히고 있는 영화의 덕목을 일깨운다. 사실과 허구를 마구잡이로 뒤섞거나 대중의 분노에 쉽사리 영합하지 않는 치열한 '리얼리즘 정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