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욕망의 기쁨과 좌절… 그 적나라한 기록들

80년대 말, 독일 베를린에 유학 갔을 때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사방의 '나체'였다. 날씨만 좋으면 다들 옷을 벗고 풀밭에 드러누웠다. 사우나에는 남녀가 다 벗고 들어가야 했다. 수영장도 누드로 수영하는 날이 정해져 있었다. 남녀에 상관없이 다 벗는 날이다. 한동안 나는 꼭 그날에만 수영하러 갔다. 물안경은 꼭 챙겼다. 물안경은 옷이 아니다!

낯선 독일의 'FKK(Freikörperkultur, 나체문화)'에 나는 몹시 흥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벗는 장소'에서는 절대 '흥분금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흥분금지'는 남자에게만 해당된다.) '다 벗었지만 안 벗은 걸로 하기'였다.

일본 목욕탕에 가면 특이한 장면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꼭 손이나 수건으로 사타구니를 가린다. 독일의 FKK와 마찬가지 원리다. '다 보이지만 안 본 걸로 하기'다. 가끔 가슴 쭉 펴고 덜렁(!)거리며 욕탕을 오가는 이들이 있다. 그건 뭐 백프로 한국 사람이다.

독일의 FKK는 나체와 연계된 수치, 부끄러움, 혹은 음란의 왜곡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다. 몸에 대한 왜곡된 문화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체의 '성적 왜곡'과 인간 문명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문명의 불만(Das Unbehagen in der Kultur)'이다. 성적 충동의 집요하고도 체계적인 억압이 문화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억압은 왜곡과 일탈을 낳게 되어 있다. 예술은 바로 이 같은 문명적 억압과 일탈 사이를 줄타기하는 방법이다.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 있는 '누드' 관련 작품들만 모아서 전시한다길래 여수에서 기차 타고 올라왔다. 30년 전 맑은 날, 베를린 공원을 자전거 타고 달릴 때와 같은 흥분이었다. 그러나 뻔하게 미끈한 그리스 조각상이나 여인의 허연 둔부로 가득 찬 르네상스 그림들이 아니었다. 인간 욕망의 기쁨과 좌절의 적나라한 기록이 방마다 가득했다. 건성으로 지나치기 힘든 그림들이 너무 많았다.

내겐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이 참 좋았다. 풍만한 여인의 토르소가 수십 개의 누런 바나나를 앞에 두고 몸을 비틀고 있는 그림이다. 키리코 특유의 과장된 원근법 끝에는 기차가 허연 연기를 날리며 달리고 있다. 아주 희한하게 에로틱하다. 그림 제목도 '시인의 불확실성'이란다. 거참.

욕조에 있는 병든 아내의 가냘픈 다리만을 그린 피에르 보나르의 그림도 한참을 봤다. 누군가 옆에서 이 화가는 병든 아내 목욕 그림을 300개가 넘게 그렸다고 했다. 성적 욕망과는 상관없는 이 누드화의 묘한 느낌은 도대체 뭘까.

바클리 헨드릭스의 흑인 남성 누드화는 충격이었다. 제목은 '나체 흑인 금지'였다. 그림에서 흑인 남자 모델은 누드화의 여자 모델이 전형적으로 취하는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다. 벗은 여성을 위에서 아래로 찬찬히 훑어 내려가는 누드화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백인 남성의 권력적 시선에 대한 경고다. 아, 이 흑인 모델도 안경을 벗지 않고 있다.

오로지 전시회를 보기 위해 여수에서 일부러 올라왔다. 서울은 나쁘다. 운전할 때, 타인이 차선을 바꾸도록 절대 허락하지 않는 서울은 미친 도시다. 잠시 후면 자신도 차선을 바꿀 거면서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실 올림픽 공원의 소마미술관에서 하는 이번 '누드 전시회'는 충분히 가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매일매일 버티듯이 서울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이라면 정말 가봐야 한다. 당신들의 서울에도 이토록 착하고 아담한 공간에 이토록 매력적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물안경이든 안경이든 옷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 명작전―누드 소마미술관에서 12월25일까지]

▲장소: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10월 30일까지 휴관일 없음)

▲입장료: 성인 1만3000원, 65세 이상 6000원, 청소년 9000원, 어린이 6000원

▲문의: (02)801-7955, www.tateseoul.com

▲주최: 조선일보사·국민체육진흥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