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 징크스' 날린 8연속 버디

고진영(22)은 지금까지 한국 여자 골프의 '1인자'였던 적이 없다. 지난해 3승을 거두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대상을 차지했지만, 최고 스타는 다승왕(7승) 박성현(24)이었다. 박성현이 미국 진출 준비로 많은 대회에 출전하지 않아 대상 포인트가 적었을 뿐 실력이 뒤져 상을 못 받은 게 아니었다.

박성현이 빠진 올 시즌 많은 전문가와 팬이 고진영 '독주 체제'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졌다. 고진영은 상반기 11대회에 출전해 톱 10에 6차례 들었지만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그 사이 김지현(26)이 3승, 이정은(21)·김해림(28)이 2승씩 거둬 '빅3' 체제를 구축하며 앞서 나갔다.

고진영은 막상 자기에게 기대가 쏠리자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에는 대부분 박성현 언니를 따라가는 입장이라 동기 부여가 됐다"며 "하지만 언니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스포트라이트가 내게 쏠리는 것에 부담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 올해부터 바꾼 스윙 자세도 전반기 부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올 시즌부터 스윙 교정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심리적인 안정과 스윙 자세 교정에 집중한 그는 시즌 후반기 첫 대회에서 '고진영의 컴백'을 알렸다. 11~13일 제주 오라컨트리클럽(파72·6545야드)에서 열린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총상금 6억원). 대회 중반까지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던 고진영은 2라운드 후반 11번홀부터 18번홀까지 8홀 연속 버디를 몰아치며 단숨에 공동 2위로 치고 올라왔다. 8홀 연속 버디는 KLPGA 최다 연속 버디 타이기록이다. 앞선 기록은 조윤지(26)가 2015년 5월 E1채리티 마지막 라운드에서 세운 1~8번홀 연속 버디다. 고진영은 마지막 날 1번홀(파4)에서도 버디를 했지만, 연속 버디 기록은 한 라운드에서만 인정된다. 미국프로골프(PGA)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최다 연속 버디 기록은 '9홀 연속'이다.

마지막 날에도 그는 보기 없이 버디 6개를 잡아내며 합계 17언더파 199타로 우승 상금 1억2000만원을 받았다. 시즌 첫 번째이자 통산 8번째 우승이다. 고진영은 13번홀까지 단독 선두였지만 1타 뒤진 이승현(26)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승부처는 14번홀(파4)이었다. 고진영은 5m 버디 퍼트에 성공하며 보기에 그친 이승현을 3타 차로 따돌렸다. 이후 15·17번 홀에서 잇따라 버디를 잡으며 여유 있게 우승했다. 고진영은 우승 직후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며 눈물을 쏟았다. 그는 "할아버지께서 작년까지만 해도 기억이 괜찮았는데 올해는 큰손녀인 저도 기억을 못 하신다"며 "그런데 TV에 나올 땐 저를 알아보신다. '내가 더 잘하면 할아버지가 나를 기억하시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골프 여제' 박인비(29)는 18번째 대회에서도 '국내 무관 징크스'를 깨지 못했다. KLPGA 투어에 출전해 준우승만 6번 기록한 그는 이번 대회를 공동 56위(3오버파)로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