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도 공감할 이야기 그렸죠

"뷰티풀(beautiful), 프리티(pretty)로는 안 되는, 우리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있어요. '아련하다' '아릿하다' 같은 감정들요. 시골 냇가, 돌로 놓은 징검다리, 풀꽃과 갈대숲…. 무슨 색깔이라 콕 집어 말하기도 어려운,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낸 것 같은 풍경들을 그리죠."

애니메이션 감독 안재훈(48)의 작품에는 늘 '한국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소중한 날의 꿈'(2011),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 등 내놓는 작품마다 과장 없는 캐릭터, 수채화처럼 맑은 화풍이 도드라진다. 오는 31일 황순원 원작 '소나기' 개봉을 앞둔 그는 "보고 나서 '아, 내 얘기네, 우리 거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빛깔도 사람도, 산과 들도, 일본이나 중국 것과 우리 것은 다르잖아요. 해외 영화제에서 만난 외국인 관객들도 그 차이를 알더군요."

널리 알려진 원작 소설이지만, 글로 읽으며 상상했던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걸 보는 건 즐거운 경험이다. 연필로 세밀하게 그린 뒤 색을 입힌 우리 풀꽃이 아름답고, 초가을에서 늦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색감도 잘 살아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함께 소나기를 맞은 뒤 소년의 등에 업혔을 때 소녀의 분홍색 스웨터에 남은 보라색 꽃물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소녀가 '나 죽은 뒤에 꼭 이 옷 입혀 묻어달라'고 한 그 옷이다. 안 감독은 "단순히 추억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잊고 있던 추억이 되살아나게 하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저와 동료들은 '캐릭터' 대신 '그림 배우'라고 불러요. 누구나 기억 속의 소년 소녀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만든 얼굴 위에 각자 마음속에 품었던 얼굴들이 겹쳐지길 바랍니다."

전작이 '메밀꽃 필 무렵'(이효석), '운수 좋은 날'(현진건), '봄봄'(김유정)의 옴니버스였고, 연말엔 '무녀도'(김동리)가 개봉된다. '날개'(이상)와 '눈길'(이청준)도 만들 계획. 근대문학 연작을 만드는 이유를 묻자, 안 감독은 '소중한 날의 꿈' 지방 상영 때를 떠올렸다. '소중한…'은 70년대 평범한 고교생들의 꿈과 사랑을 담은 작품. "할머니·할아버지가 40~50분 오셨는데, '만화영화는 애들 보는 건 줄 알았는데, 자네가 만드는 거면 또 보고 싶네' 하시는 거예요. 어르신들이 열심히 살아온 시대, 애틋한 기억을 떠올린 거죠. 1년에 한 편은 근대문학이 원작인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지요."

그는 창작 애니메이션 '살아오름: 천년의 동행'도 작업 중이다. 죽어버린 마음을 갖게 된 도시 여자와 저승길 안내자 '꼭두'의 이야기. 안 감독은 "요즘은 '메밀꽃 필 무렵'의 장돌뱅이 허생원이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했던 마음이 공감된다"고 했다. "우리 애니메이션은 이제 관객에게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 같아요. 지금은 진심을 다해 쓸 뿐이지만, 언젠가 관객이 결혼을 허락해주시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