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128분… 흥행 감독의 반전 강박증

박훈정 감독은 영화 '신세계'(2012)에서 '대부'와 '무간도'를 솜씨 있게 버무린 뒤 한국적으로 변주해냈다. 하지만 23일 개봉하는 '브이아이피(V.I.P.)'에서는 장동건·김명민·박희순·이종석이라는 화려한 카드를 손에 쥐고서도 제대로 섞지 못해서 자꾸만 떨어뜨린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으로 탈북에 성공한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한국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다. 담배와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열혈 경찰 '채이도'(김명민)는 범인 검거에 열의를 올리지만, 차분하고 이지적인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은 사건 자체를 덮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들은 영화 전체를 든든하게 떠받치는 두 기둥처럼 좋은 대비를 빚어낸다. 특히 정장 차림으로 사우나에 들어가 연신 땀을 흘리면서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잊지 않는 국정원 요원 역의 장동건은 욕지거리를 일삼는 거친 사내들로 넘치는 영화에서 단연 빛난다. "남조선에서는 그렇게 그윽하게 경찰 아저씨를 쳐다보는 게 아니야"라면서 상대를 나무라는 한국 경찰 역의 김명민도 전작 못지않게 묵직한 뚝심을 발휘한다. 이처럼 선명한 인물 설정과 감각적 대사들로 가득한 시나리오는 박훈정 영화의 특징이다. 박 감독은 연출 데뷔 이전에 '악마를 보았다'(2010)와 '부당거래'(2010)의 각본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던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다.

하지만 전작에서도 이따금 발견됐지만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한 기시감(旣視感)은 공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경찰 '채이도'는 '레옹'의 부패한 형사를 연상시키고, 연쇄살인을 저지르고서도 태연하게 미소 짓는 북한 귀순자 '김광일'(이종석)은 '다크 나이트'의 악당 조커의 판박이다. 클리셰(clich�)에 가까운 진부한 장면들은 배우들의 열연을 반감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영화는 초반부터 폭력과 노출, 마약까지 강도 높은 장면이 적지 않아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다. 출신 성분 좋은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연쇄살인을 저지른다는 설정은 폭력의 강도와는 무관하게 느닷없고 맹목적으로 보인다. 강도 높은 폭력과 선정적 노출이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 구조를 덮어버리는 '가리개 역할'을 하는 건 최근 한국 상업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약점이다.

하드보일드 수사극과 스파이 영화의 장르적 공식을 능수능란하게 교직(交織)한 중반 장면들은 뚝심이 넘친다. 하지만 북한 귀순자가 대낮의 한강 다리 위에서 경찰에게 마구잡이로 총을 쏘는 후반부에 이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이야기의 그럴 듯함을 뜻하는 개연성(蓋然性)은 다리 아래로 던져버린 걸까. 아무리 무법자(無法者)들에 대한 영화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엔 정녕 법도 없다는 걸까. 반전(反轉)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말끔하게 끝내지 못하고 128분까지 상영 시간을 끌고 가는 결말에 이르면 애꿎은 시계만 자꾸 쳐다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