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가장 민주적 예술… 누구나 王 될수 있어"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쓰는 것뿐이다. 자기 성찰과 자유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짓궂다. '빵 굽는 타자기'에서 그처럼 간절히 작가의 삶을 갈망했던 청년을 축제 70주년 잔치에 동갑내기라고 불러낸 것은.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올해 70주년을 자축하며 기획한 '스피릿 오브 47'의 스타는 작가 폴 오스터(70)였다.

"1947년은 전쟁의 트라우마로 가득한 해였습니다. 올 초에 나온 '4321'이나 오래전에 쓴 '뉴욕 3부작'이나 내가 쓴 모든 소설은 시대가 낳은 트라우마와 복합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소설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가장 민주적인 예술입니다. 문학 안에서는 누구나 왕이나 여왕이 될 수 있고 신이 될 수도 있지요. 책은 우리에게 세상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지난 주초 에든버러 킹스시어터 1300석을 빼곡히 채운 독자들은 올해 만 70세가 된 '청년 작가' 오스터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오스터는 지난 1월 그의 70세 생일을 바로 앞두고 866쪽짜리 대작 '4321'을 펴냈다.

서른이나 마흔에는 쓸 수 없는 작품이 있다. '4321'이 그렇다. "66세가 되던 해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버지가 66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오스터에게 가족, 특히 아버지의 존재는 글쓰기의 절대적 출발점이다. 그의 첫 소설 '고독의 탄생'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쓴 작품이다. "진실을 찾으려 할 때는 예기치 못한 것에 대비할지니, 이는 진실은 찾기 어렵고 진실을 찾으면 당황하기 때문"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경구로 시작하는 이 책은 미국의 이민사인 동시에 사랑과 증오, 연민으로 가득한 개인사이며 그리스 비극 같은 자기 발견을 담고 있다. '4321'에서 오스터는 아버지의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 더 많은, 더 끔찍한 진실들을 찾아다닌다. 6·25 전쟁에서 죽은 삼촌, 케네디 대통령 암살, 월남전 징병 등 현대사의 사건들이 이 소설의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에 촘촘히 꿰매져 있다.

소설이 빚어내는 '진실의 기제'로 그는 우연을 지목했다. "지어낸 이야기가 진실을 왜곡한다고요? 실제 세상에는 더 기막힌 우연이 많습니다." 오스터는 그 우연은 가능성(chance)이라기보다 예상치 못한 일(unexpected)이라고 설명했다.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 간수와 피수용자의 아들딸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양가 부모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현실입니다." 그는 "불가능한(impossible) 일, 있을 수 없는(improbable) 일이 내 관심사"라고 했다. 행사가 끝난 뒤 독자 사인회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던 오스터는 "나이 드는 것은 기쁘지 않지만, 막을 방법이 있겠나? 그저 살아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스터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뉴욕주 뉴어크에 작가인 아내 시리 허스트베트(62)와 살고 있다. 휴대폰도 없고 컴퓨터도 쓰지 않는다. 지난 4월 뉴욕타임스 독자와의 인터넷 채팅 행사 때도 "내 옆에서 키보드를 쳐주는 청년이 있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그런 그가 2018년부터 작가들의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펜아메리카(Pen America) 대표를 맡았다. 트럼프 정부의 반(反)이민 정책에 맞서 반대 성명을 냈던 오스터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또 그런 활동이 작품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