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8.24 10:16

올 여름 유난했던 무더위를 코스모스로 이겨냈다. 폭염이 지나야 피어나니 1년생 꽃 코스모스는 아니다. 무려 40년 가까이 피고 있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다. 혼돈과 무질서의 카오스와는 반대로 조화와 질서를 의미하는 코스모스, 우주에 관해 쓴 책이다. 당시 태양계 탐사를 위해 쏘아 올린 보이저호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을 꼽아도 모자를 만큼 줄줄이 우주탐사선이 발사됐으니 과학서로는 꽤 옛날 책을 읽은 셈이다. 국판 크기로 7백 쪽이 훨씬 넘게 두툼해서 언젠가 읽어야지 미뤄오기만 했던 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틈만 나면 붙잡고 앉아 메모도 해가며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책 읽기 모임 덕분이었다. 지역 도서관의 독서회에서 함께했다가 이사하는 통에 흩어진 게 못내 아쉬운 몇몇이 새로 만든 모임이다. 혼자서는 엄두를 내기 힘든 책을 읽고서 함께 소감을 나누자고 예순 안팎의 여자들이 뭉친 것이다. 편하게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는 나이련만 독서와 토론을, 그것도 심도 있게 하기를 열망하는 분들이 가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첫 번째 읽기로 정한 책이 ‘코스모스’였다.

이해하기 쉽게 써서 천문학의 대중화에 한 획을 그은 책이기도 하지만, 작가 유시민이 저서 ‘글쓰기 특강’에서 논리적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전략적 독서목록에 넣은 책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목록의 기준은 인간, 사회, 문화, 역사, 생명, 자연, 우주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개념과 지식을 담은 책, 정확하고 바른 문장을 구사한 책, 지적 긴장과 흥미를 일으키는 책이었다. 우리가 읽어나갈 책 선정의 기준이 될 만했다. 게다가 ‘코스모스’는 일전에 한 시인에게 건네받은 필독서 목록의 맨 위에 있어서 과학과 인문을 망라한 고전으로 기대가 컸다.


블루 리더스

아무렴 책의 9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유작가도 저서에서 인용하며 감탄한 바 있다. “애플파이를 만드는 데는 밀가루, 사과, 설탕 조금, 비전秘傳의 양념 조금 그리고 오븐의 열이 필요하다. 파이의 재료는 모조리 설탕이니 물이니 하는 분자들로 이뤄져 있다. 분자는 다시 원자들로 구성된다. 탄소, 산소, 수소, 그 외의 원자들이 파이의 재료가 되는 분자들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이 원자라는 것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수소를 제외한 나머지 원자들은 모두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고 보니 별이 우주의 부엌인 셈이다. 이 부엌 안에서 수소를 재료로 하여 온갖 종류의 무거운 원소라는 요리들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별은 주로 수소로 된 성간 기체와 소량의 성간 티끌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수소는 대폭발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수소 원자는 코스모스가 비롯된 저 거대한 폭발 속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애플파이를 맨 처음부터 만들려면, 이렇게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풀어나갔기에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요, 전략적 독서목록에 들고 있는 게 아닐까.

“별들의 일생에 비하면 사람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하루살이 눈에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지겹게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한심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별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은 아주 이상할 정도로 차갑고 지극히 단단한 규산염과 철로 만들어진 작은 공 모양의 땅덩어리에서 10억분의 1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구를 아껴야 한다는 게 ‘코스모스’의 결론이었다.

비록 “우주 앞에서 우리의 생명, 인생, 문명, 역사는 그저 보잘 것 없는 존재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했을지라도 우리는 ‘코스모스’를 읽고 결코 보잘 것 없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 책을 읽고서는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내 ‘창백한 푸른 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바로 1990년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의 사진을 부르는 명칭이다. 토론 후 우리 모임의 이름 짓기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을 때, 나는 창백한 푸른 점을 상기시켰다. 결국, 그 푸른 점에서 살며 책을 읽는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블루 리더스’라 칭하기로 했다.


당신, 그런 책도 다 읽어?

우주를 바라봤으니 이제는 창백한 푸른 점에서 사는 인간의 시원부터 현재까지를 살펴보자 싶었다. 그래서 두 번째 읽을 책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로 정했고, 지금 열독중이다. 6백 쪽 가까이 되는 책이다. 작가의 통찰력이 보통 깊고 넓은 게 아니다. 이런 책을 읽노라면 너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리더스 하이’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달리기를 1시간여 하다 보면 황홀감 같은 ‘러너스 하이’에 휩싸일 수 있다고 하듯 말이다. 그 고양된 느낌 때문에 계속 달리기를 하게 된다는데, 리더스 하이 또한 계속 책을 읽게 해주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러너스 하이는 고작 5분 내지 10분의 체험에 그치고, 알게 모르게 신체에 손상을 주는 모양이다.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격한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은가 보다. 리더스 하이는 다르다. 영국의 한 대학이 독서, 산책, 음악 감상, 비디오 게임 등 각종 스트레스 해소법들을 측정해 본 결과, 독서가 1위로 나타났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두루 건강해지도록 스트레스를 낮춰주는 리더스 하이다. 대신 자긍심은 높여준다. 모임의 한 분은 ‘코스모스’를 읽는 동안 남편이 놀라워하더란다. “당신, 그런 책도 다 읽어?”

쉽지는 않다. 나부터도 그렇지만 바깥나들이나 텔레비전은 좀 줄이고, 침침해져 가는 눈을 책에 박고 있어야 두툼하고 만만찮은 책을 독파할 수 있다. 토론까지 준비하려면 그냥 훑듯 읽어서도 안 된다. 혼자서는 마냥 진도가 더딜 터지만, 함께 읽기로 한 약속 덕에 힘을 받는다. 함께하는 리더스야말로 하이를 올려주는 진짜 동력인 것 같다. 첫 모임 후 카톡방에는 “행복했습니다.”가 만발했다. 나는 어디선가 보고 적어둔 구절을 올렸다. “A reader lives a thousand lives before he dies. The man who never reads lives only one(책을 읽는 사람은 죽기까지 수천 생을 살아보지만, 읽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생만 살 뿐이다).”

곧 코스모스가 만개할 가을이다. ‘코스모스’로 시작한 블루 리더스의 다음 모임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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