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탐식탐독] 필립 로스와 체리의 사랑

필립 로스를 좋아한다. 이 작가는 정말 못됐는데, 자신의 그 고약함을 소설이라는 형식에서 십분 발휘해내고, 그것을 읽는 나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못돼도 되는구나'라고 안도하며 어떤 악덕이라도 소설에 이용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악덕이 아니라는 자기 긍정에 이른다. 그러니까 내게 필립 로스를 읽는 것은 일종의 자기 위안이자 자기 치유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읽고 나면 불에 덴 것 같이 화하고 얼음 창고에 갇힌 것처럼 얼얼함을 주는 책을 쓰는 필립 로스도 애송이 시절이 있었으니, 그때 쓰인 책이 '굿바이, 콜럼버스'다. 여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소설집으로 필립 로스의 첫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이 된 '굿바이, 콜럼버스'를 읽다 보면 싱긋싱긋 웃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소설에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풋풋함과 어눌함.

능숙한 소설만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고 풋풋하다고 해서 소설다운 소설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읽다 알았다. 부분 부분이 반짝거리는데 아직 구슬이 꿰어지기 전이라 질서라든가 형식 같은 게 갖춰지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다. '굿바이, 콜럼버스'는 여름 한철에 벌어지는 가난한 유대인 대학생 남자의 풋사랑 이야기다. 남녀는 그 여름을 산책과 수영과 드라이브와 섹스로 채운다. 내가 이 소설에서 흥미를 느낀 부분은 섹스 전후의 농담과 장난과 유희들이다. 이 둘은 말에 함정을 파고, 함정에 빠져주기도 하고, 언어유희에 자조와 냉소를 섞는다.

또 그들의 여름을 채우는 것이 체리다. 이들은 계속해서 체리를 먹고, 체리 씨를 뱉어대고, 사랑을 나눈다. "(…)그릇에 체리를 가득 채워 텔레비전 방에서 한참 동안 지저분하게 먹었다. 나중에 우리는 소파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어두워진 방에서 욕실로 걸어갈 때는 맨발바닥에 체리 씨가 밟혔다. 집에 가 그날 밤 두 번째로 옷을 벗었을 때 발바닥에 붉은 자국들이 보였다." 나는 이 소설을, 어두운 방을 걷다 체리 씨를 밟는 부분이, 발바닥에 난 붉은 자국들이, 살렸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부분들도 뭔가를 건드리지만. "서로에게 정말 만족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브렌다는 머리를 흔들어서 내 얼굴에 물기를 뿌렸다. 나에게 물방울이 닿는 순간, 나는 그녀가 이 여름, 그리고 바라건대 그 이후에 관한 약속을 했다고 느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체리 씨를 마당에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