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기억은 잃었지만, 내 손은 살인을 기억한다

강렬한 원작은 힘이자 부담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서사와 이미지를 가진 베스트셀러라면, 부담은 배가 된다.

내달 6일 개봉하는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은 24만부가 팔린 김영하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다. '구타유발자들'(2006) '용의자'(2013) 등 만듦새 좋은 영화를 쓰고 연출해온 원신연 감독은 소설책 첫 페이지에 '소설과 가장 가까우면서 먼 영화가 될 것'이라 써 놓고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감독의 다짐대로, 영화는 소설에서 '오래전 살인을 그만둔 연쇄살인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간다'는 골격을 빌려오되, 주인공의 성격과 살인의 이유, 등장인물의 경중 등에 변화를 줘 같은 듯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살인자의 황량한 내면처럼 퇴락한 소도시의 풍경, 몸무게를 10㎏ 이상 빼 주름지고 깡마른 노인을 연기한 설경구의 힘으로, 스릴러 영화로는 근래 보기 드물었던 속도감과 추진력을 발휘한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기 전, 3분의 2 정도 지점까지는.

"내 머리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내 손은 습관처럼 기억한다, 살인을." 동물병원을 운영하며 착한 딸 '은희'(설현)와 함께 사는 '병수'(설경구)는 연쇄살인마다. 17년 전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 마지막 살인을 한 뒤 사람 죽이는 걸 그만둔 것뿐. 그가 사는 소읍에서 여성들이 살해되기 시작하는데, 우연한 차량 접촉 사고로 조우한 남자 '태주'(김남길)의 눈빛에서 살인자임을 직감한다. 병수는 태주를 경찰에 신고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고, 태주는 은희를 통해 서서히 병수에게 접근해온다. 사라지는 기억과 싸우며, 병수는 딸을 지키기 위해 주변 모두와 맞선다.

원작의 병수는 '더 완벽한 살인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살인을 했던 소시오패스지만, 영화의 병수에게 살인은 '청소'다. 가정폭력 아버지부터 악덕 사채업자까지, 그는 자신의 행동을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쓰레기들을 쓸어내는, 꼭 필요한 살인"이라고 말한다. 딸에 대한 애틋한 부정(父情)은 병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의 행적의 개연성을 만들어낸다. 소설 속엔 희미한 존재였던 '태주' 역시 배경과 성격을 가진 병수의 적대자로 등장한다. 번쩍이는 플래시백으로 사실과 망상이 뒤섞인 혼돈을 표현해내는 화면도 인상적. 기억을 잃을 때마다 한쪽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설경구의 세밀한 연기도 일품이다.

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신·구 연쇄살인마의 충돌로 가는 클라이맥스는 새롭다고 하기 힘들다. 고급스러운 심리 스릴러였던 영화가 많이 본 듯한 액션 스릴러로 바뀌는 셈. 이것도 반전이라면 반전이랄까. 수의사의 왕진 가방이나 기억을 놓지 않기 위한 녹음기 등 영화 구조를 쌓아올리기 위한 장치들도 과한 느낌이다. 특히,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에도 이어지는 마지막 10분은 어렵게 쌓아올린 영화의 힘을 쏙 빼놓는 사족(蛇足)처럼 보일 것 같다. 상영시간 118분,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