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 규제'가 외국 물류社만 배불린다

"우리나라 물류 산업 다 죽이고, 외국 물류업체나 해운사의 배만 불리는 법안입니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최근 만난 한 대기업 물류 자회사의 A 임원은 한숨부터 쉬었다. 대기업 물류회사는 그룹내 계열사의 물류(2자 물류)만 취급하고, 일반 화주의 물류(3자 물류)를 금지하는 해운법 개정안을 언급하면서 한 말이다. A 임원은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를 하지 말라고 해 해외 투자하고 시장을 넓혀왔더니 이젠 계열사 일감만 하라 한다"며 "시장 원리는 없고, 정치 논리뿐이다"면서 불만을 터트렸다. "우리나라 물류 산업 경쟁력을 망가뜨리는 황당한 규제"라는 것이다.

◇'계열사 물량만 취급'… 황당한 해운법 개정안

정유섭(자유한국당)·정인화(국민의당) 의원은 지난 2월과 6월 해운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대기업 물류회사는 계열사 물류만 취급하도록 규제하는 게 핵심이다. 그룹의 일감 몰아주기로 덩치를 키운 대기업 물류회사들이 '바게닝파워(교섭력)'를 내세워 국내 해운사에 낮은 운임을 강제하는 '갑질'을 저질러왔다는 게 법안 발의의 배경이다. 정유섭 의원은 "대기업 물류회사가 중소 화주(貨主) 물량까지 싹쓸이해 중소업체들이 고사하고, 물류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했다. 대기업 물류회사가 해왔던 3자 물류를 중소업체가 맡도록 해 수익을 늘려주고, 해운사엔 가격 협상력을 높여 부진에 빠진 해운업을 돕겠다는 것이다.

규제 대상은 현대글로비스·판토스·롯데로지스틱스·삼성SDS·삼성전자로지텍·효성트랜스월드 등이다. 상위 7개 대기업 물류회사의 작년 전체 매출은 32조5888억원. 이 중 그룹 내 물량으로 올린 매출은 63% 정도인 20조6086억원이다. 규제가 현실화되면 7개 회사가 그룹 이외 기업으로부터 올린 매출 11조9800억원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할 땐 언제고"

대기업 물류회사에 대한 3자 물류 규제는 그동안 대기업 내부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덩치를 키워 글로벌 물류회사를 육성하겠다는 정부 정책과 어긋난다는 게 업계 입장이다.

대기업 물류회사들은 그동안 정부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으로 그룹 물량은 줄이고, 3자 물류 비중을 꾸준히 늘려왔다. 정부는 2011년부터 '한국판 DHL'을 만들겠다면서 해외 진출 등 물류기업 육성 지원 정책을 추진해왔다. 이후 물류회사들은 해외 네트워크 확장에 주력해 판토스와 CJ대한통운은 각각 해외에 350개, 150개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4대 그룹 물류회사 임원은 "정부 정책을 충실히 따랐던 업체일수록 피해가 커지게 된다"고 말했다.

◇"글로벌 물류·해운사만 배불릴 것"

전문가들도 국내 해운사·중소 물류업체 살리기라는 법 개정 취지와 달리 오히려 중소 물류업체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외국 해운·물류회사 이익만 늘려줄 것이라고 우려한다. 국제 물류 업무는 화주들이 원하는 지역마다 네트워크를 갖추고, 적정한 비용으로 서비스할 수 있어야 한다. 대기업 물류회사가 3자 물류에서 손을 떼면 재무나 해외 네트워크가 취약한 중소 물류업체가 아니라 글로벌 회사들이 시장을 가져갈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구교훈 우송대 물류시스템학과 교수는 "화주가 해외 네트워크도 제대로 없는 중소업체에 화물을 맡기겠느냐"면서 "화주는 DHL 같은 글로벌 회사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물류회사의 물량을 줄여 국내 해운사에 해상 운임 협상력을 높여주겠다는 것도 시장 논리를 무시한 '우물 안 개구리식' 발상이라는 게 물류업계 주장이다. 물류회사는 수출 기업을 대신해 국내 해운사뿐만 아니라 글로벌 해운사와 협상을 진행하고 경쟁력 있는 운임을 확보, 수출 기업의 물류비를 줄여주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대기업 물류회사가 3자 물류 규제로 덩치가 작아지면 운임 협상력이 떨어지고, 수출 기업의 물류비 상승과 수출 경쟁력 악화를 초래할 수 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우리 물류 산업의 주도권을 외국에 상납하는 꼴"이라고 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문위원도 법 개정에 사실상 반대 입장이다. 이승재 전문위원은 지난 1일 검토보고서에서 "대기업의 진입 제한은 글로벌 대형 외국계 물류회사가 국내 시장을 잠식하도록 할 우려가 크고, 화주의 물류회사 선택을 제약해 수출입품 비용 상승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1자 물류, 2자 물류, 3자 물류

물류업계 용어로, 화주(貨主)가 직접 화물을 운송하면 1자 물류(1PL), 계열사가 하면 2자 물류(2PL)로 분류한다. 3자 물류(3PL)는 화주와 관련 없는 전문 물류 업체가 운송하는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