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9.15 14:15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얼음 얼리는 그릇 하나를 사려고 용품점에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모자들이 날 유혹한다. 남들이 다 쓰는 양산을 마다하고 늘 모자를 즐겨 쓰는 나에게 이보다 큰 유혹은 없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려고 하면서도 나는 이미 모자 진열대 앞에 서 있다. 연한 남보랏빛 썬 캡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쓰고 나간 모자를 벗고 남보랏빛 모자를 쓰자 얼굴이 환해진다. 세상에 모자 색깔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다니. 사실 보통 때 같으면 나는 저 색이 안 어울릴 거라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모자를 냉큼 써 본 이유는 바로 환갑 넘어 찾은 퍼스널 컬러(personal color) 때문이다.

퍼스널 컬러(personal color)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체의 색과 조화를 이루어 생기가 돌고 활기차 보이도록 하는 개개인에게 어울리는 색을 말한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미국, 일본, 유럽 등에서 4계절의 이미지에 비유하여 신체 색을 분류하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먼저 따뜻한 색과 찬색으로 나눈다. 다시 따뜻한 색은 봄 색과 여름 색으로 나누고 찬색은 여름 색과 겨울 색으로 나누었다. 말 그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이미지에서 보이는 색채를 이용하여 개인의 개성 있는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이다.

홍대 앞이나 강남 쪽에 가면 전문적으로 자신만의 퍼스널 컬러(personal color)를 진단해 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환갑이 넘어 무슨 그런 일까지…'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돈을 내고 해야 한다는 것이 더 거부감을 갖게 했을 것이다. 거기다 내가 퍼스널 컬러(personal color) 진단을 받을 정도까지 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퍼스널 컬러(personal color) 진단받는 장면이 나왔는데 색깔에 따라 얼굴색이나 이미지가 전혀 달라짐에 내 생각도 달라졌다.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진단받으러 갈 필요 없이 진단 기구를 만들어 해보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꽂히면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발동했다. 컴퓨터 작업이라면 자신이 있는 터라 인터넷을 뒤져 드디어 진단지를 만들어 A4로 프린트했다. 그리고 가운데 얼굴이 들어갈 구멍을 뚫었다. 혼자 얼굴에 대고 사진을 찍고 편집을 하고 났더니 충격적이다. 분명 같은 자리에서 같은 휴대폰으로 찍었는데 색깔에 따라 얼굴색이 판이해졌다.

막연히 내가 어울리는 색이 찬색인 것은 알았지만, 여름 색이 아니고 겨울 색이다. 이름 하여 시크한 겨울 쿨톤이란다. 그래서 짙은 색이 어울렸나 보다. 단순히 짙은 색이라기보다는 감색이 들어간 짙고 깊은 색이다. 그동안 예쁘다고 보여 아끼던 옷들이 돌이켜 보니 겨울 색들이었다. 가지고 있는 립스틱들을 꺼내 놓고 살펴본다. 어쩌면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색을 써 왔는지 모르겠다. 선물을 받고 내게 맞지 않는다고 이리저리 굴리던 찬 분홍색을 가지고 쓰던 립스틱과 섞었더니 내가 써야 할 립스틱 색깔이 나왔다. 다행이다. 머리 색깔은 흑갈색이니 그대로 두어도 되겠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린다. 파운데이션은 그동안 어둔 색을 썼는데 밝은색으로 바꾸어야 한다.

모자를 사기로 했다. 사기 전에 그래도 싶어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겨울 색을 들여 다 본다. 다행히 모자 색이 거기에 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샀다. 혹여나 '예순 넘은 나이에 그 무슨…'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반세기 넘어 수고한 나에게 좀 더 우아하게 기품있게 다듬어 준다면 평범한 나도 조금은 기품 있게 늙어 갈지 모른다. 갈수록 수명이 길어져 요즘은 ‘백세시대’라고 한다. 그 백세시대에 예순은 무엇을 시작해도 꽤 괜찮은 나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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