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 합격비결 알려줘? 지방으로 위장전입해"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서 생활한 지 9일째 되던 지난 12일 한국사 수업. 강사가 합격 비결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한국사 고득점 전략에 대해 말할 줄 알았다. 강사는 "지방으로 주소를 옮기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서울에선 합격이 어려우니 경쟁률이 낮은 강원도 같은 지역의 지방 행정직에 응시하는 게 훨씬 낫다"는 게 강사의 '조언'이었다. 특정 지역 지방직에 응시하기 위해선 '3년 거주' 조건을 갖춰야 한다. 서울에 대부분 주소가 있는 수험생들이 강원도 3년 거주 조건을 가질 수는 없다. 나중에 옆에 있는 수험생이 "1~2년 내 합격이 힘들 것 같으면 미리 주소만이라도 옮겨 놓으라는 말"이라고 했다. 미래의 공무원들이 합격을 위해 '위장 전입'하라는 강의를 듣고있는 것이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기자가 포함된 스터디에선 공부 대신 올 6월에 있었던 지방직 9급 공무원 경쟁률을 분석했다. 광주광역시가 51.9:1로 가장 높았고 제주가 13.6:1로 가장 낮았다. 광주 출신 수험생 박모(28)씨는 "전남에 친척이 있는데, 거기로 주소 옮기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고 했다. 정모(26)씨는 "지방 출신들은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데, 서울 출신은 지방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며 "주소를 지방으로 옮겨야 응시 기회가 더 많아진다"고 했다. 2년 후에는 서울시 공무원 시험과 지방 공무원 시험을 같은 날에 치르는 방안이 추진된다. 지방 출신이라도 딱히 유리할 게 없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난 4일 행정학 강좌 첫 시간. 강사는 "이 교실에서 행정학을 가르칠 생각 없다. 여러분이 내년 시험에 합격할 수 있게 문제 맞히는 방법만 강의할 것이다"고 했다. 한국사 강사는 칠판에 송국리 유적지, 흔암리 유적지 등 청동기시대 유적지를 칠판에 적었다. "따라 해봐. '송흔이가 화났대'. 그냥 외워. 문제 보면 생각이 날 거야."

노량진에서 '1타 강사(가장 유명한 강사)'의 조건 중 하나는 암기법을 잘 정리하는 것이다. 수업 시간마다 각종 머리글자를 이어 붙인 문구가 등장한다. 대한민국 헌법 개정사를 설명하면서 강사는 "'간직초 각각' 외워라"고 했다. 건국 헌법은 간(·)선제, 1차 개헌 후 직(·)선제, 2차 개헌은 초(·)대 연임 제한 폐지, 3차 의원내각(·)제, 4차 의원내각(·)제라는 것을 그렇게 외우라고 한다. 기자를 포함한 수강생들은 멜로디를 실어 따라 했다. 강사는 당시 개헌을 한 배경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헷갈리기만 할 것"이라고 했다.

2주 동안 학원 수업을 들어 보니 공무원 시험에 출제되는 내용은 매우 지엽적이었다. 지난 9일 응시한 진단 평가 국어 과목에서 100점 만점에 80점을 채 넘기지 못했다. 문제에 나온 맞춤법과 표준어는 처음 보는 단어들이었다. 공시족 사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국어책에는 주제별 어휘로 '우리: 기와를 세는 단위로 한 우리는 기와 2000장', '연: 양지(洋紙·서양에서 온 종이)를 세는 단위. 림(ream)의 음역어(외국어를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바꾼 것). 한 림(ream)은 종이를 셀 때 480장' 등이 있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려면 이렇게 처음 보는 단어들을 외워야 한다. 공부하는 내내 '이런 걸 외우면 나중에 공무원으로 일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은 오전 8시에 모여 외운 한자성어를 점검하는 스터디를 했다. 외워야 하는 한자성어는 방휼지쟁(蚌鷸之爭· 서로 다투다가 제 3자에게 이익을 주는 것), 교왕과직(矯枉過直·잘못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쳐 일을 그르침), 할반지통(割半之痛·몸에 반쪽을 베어내는 고통) 등이었다. 같은 뜻인 어부지리나 과유불급 같은 것을 두고 공시족은 전혀 접하지 못했던 한자성어를 매일 20~30개씩 외운다고 했다.

필수 과목이자 공시족들이 가장 어려워한다는 영어 과목에 출제되는 단어는 난도가 높았다. 한 영어 강사는 수업 시간에 "토익 만점 받는 애들도 공무원 영어 시험 보면 70점도 못 맞는다"며 "어차피 어휘는 어려워서 맞힐 수 없으니 좋아하는 숫자로 찍어라"고 했다. 공시족이 가장 많이 보는 영어 단어장은 미국 대학원 입학시험(GRE)이나 토플에 출제되는 단어를 수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