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잿빛 현실이 준 상처… 色으로 치유하다

페이스북 페이지 '색감 미술관'은 색깔 마니아들이 모인 곳이다. 이들은 화려한 색감의 그림이나 사진, 동영상을 공유하고 감상을 나눈다.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술상을 받은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이나 일본 애니메이션 명장(名匠)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속 명장면을 캡처해 올리는 식이다.

투명한 파란색 젤리를 테니스 채로 내리쳐 산산조각 내거나 새하얀 우유에 알록달록한 색의 식초를 섞어 오로라의 색감을 재현하는 영상도 인기다. 약 40만명 회원들이 이런 종류의 콘텐츠를 보고 감상평을 공유한다. "티끌 하나 없는 색을 볼 때면 왜 이렇게 짜릿한지 모르겠어요." "기분이 몽롱해지는 영상이네요. 힐링 제대로입니다."

색(色)에 빠진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우울할 때 하나씩 꺼내먹는 초콜릿처럼 화사한 색을 꺼내보며 간단하게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색감 미술관' 회원 이지수(27)씨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울적해질 때 스마트폰으로 색감 좋은 영상을 보고 나면 한결 머리가 가벼워진다"며 "여러 가지 색의 페인트통을 모아놓고 터뜨리거나 크레파스를 가루 내 공중에 흩날리는 등 주로 색으로 짜릿함을 주는 실험 영상을 즐겨본다"고 했다.

색을 단지 감상만 하는 것도 아니다. 보는 행위를 넘어 색을 이용한 놀이로까지 발전하는 중이다. 초등학생들 사이 대유행한 '액체 괴물'은 색감 마니아들의 필수품이다. 손으로 만지작거려 원하는 모양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물렁물렁한 촉감의 장난감으로 특유의 투명하고 영롱한 색감 때문에 인기다.

물감을 섞어 원하는 색으로 액체 괴물을 만든 뒤 가지고 노는 모습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공유한다. 유튜브에 '액체 괴물'을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만 96만개가 넘는다. 직장인 허은순(34)씨는 "분홍색 물감과 면도 크림을 섞어 딸기 아이스크림색 액체 괴물을 만들었다"며 "손으로 조몰락거리며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힐링이 된다"고 했다.

색감을 자극하는 모바일 게임 'I LOVE HUE'(색을 사랑해)도 인기다. 다양한 색상의 도형을 채도 순서대로 배열하는 일종의 '색 퍼즐 맞추기' 게임이다. 색에 빠진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해 다운로드 수 100만을 넘었다. 실력에 따라 레벨이 총 7등급으로 나뉘는데, 마니아들은 자신의 레벨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며 색을 구분하는 감각을 자랑한다.

젊은 세대의 색 사랑은 2~3년 전 불었던 '컬러링북'(색칠 놀이책) 열풍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당시 출간됐던 컬러링북 '비밀의 정원'은 각종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성인을 위한 색칠 놀이'를 유행시켰다. 김규리 한국컬러테라피협회 대표는 "심신이 힘들지만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는 젊은 세대가 간단하고 직관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컬러테라피를 시작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임영진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는 "색을 통한 심리 치료는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놀이 치료의 일종인데, 성인들의 심리 치료 방법으로 애용되는 걸 보면 그만큼 취업·결혼·육아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하재근 문화 평론가는 "미래가 무채색이라고 생각하는 20~30대들이 파스텔처럼 화사한 색에서 위안을 얻는 것 같다"며 "스마트폰을 통해 즉각적이고 단순한 자극을 얻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의 새로운 힐링 트렌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