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치욕적인 삶이냐, 의로운 죽음이냐… 亂世에 선 두 男子

'1636년 12월 청(淸)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들이닥쳤다.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10월 3일 개봉)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작품. 이 첫 자막이 끝나면 영화는 두 신하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준다. 청과의 화친을 모색하기 위해 홀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향한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은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도 미동하지 않는다. 남한산성으로 떠난 어가(御駕)를 뒤쫓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은 늙은 뱃사공이 행여 적군에게 길 안내를 해줄까 근심한 나머지 결국 검을 꺼내든다. '만고의 역적'으로 알고 있던 최명길은 결코 비겁하지 않고, '충절의 상징'인 김상헌은 냉혹함을 갖추고 있다. 이렇듯 영화는 우리가 역사에 대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을 뒤흔들며 시작한다.

제작 시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해석되는 작품이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380년 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도 '시계(視界) 제로'의 현 상황에서는 결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라며 화친(和親)을 권한다. 반면 '척화파(斥和派)' 김상헌은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라고 항전(抗戰)을 고집한다. 둘의 대사는 모두 지금 우리의 고민이 된다. 이들의 대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다. 민초의 삶을 언급하며 낙관주의를 설파하는 주화파 최명길과 죽음을 입에 올리며 비관주의로 기우는 척화파 김상헌의 대비도 흥미롭다.

영화에는 약점도 적지 않다. 소설책의 챕터를 넘기듯 11장으로 구분한 구성 방식 때문에 자연스러운 흐름이 끊기고 관객들의 몰입이 반감되고 만다. 병자호란이 남한산성이라는 단일한 공간에서 47일이라는 제한된 기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화도 끊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로 뚝심 있게 밀고 가는 편이 좋았을 법했다. 인조(박해일)가 청 태종 앞에서 '3배 9고두(三拜九叩頭)'를 하는 '삼전도의 굴욕'과 몇몇 전투 장면을 제외하면 카메라의 움직임도 투박하고 정적(靜的)이다.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는 인조의 시선에서 단상의 청 태종을 올려보는 앙각(仰角) 촬영은 비루하고 치욕적인 역사를 되새기게끔 한다. 소설의 대사를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긴 듯한 문어 투의 대사들도 영화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문학적이다.

2시간 20분의 상영 시간이 다소 긴 듯한 아쉬움은 있지만, 이병헌과 김윤석이라는 든든한 두 기둥이 버티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의 결정적 미덕이다. 별다른 움직임 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도, 두 배우는 설전(舌戰)만으로 스크린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충신 김상헌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잡혀갔지만, 영화에서는 자결을 택한다. 이 설정 외에는 한국 사극의 고질적 문제점으로 꼽혔던 사실 왜곡이나 '분노 상업주의'가 없다는 점도 미덕이다.

시종 어둡고 암울한 화면의 색채 때문에 추석 연휴의 훈훈한 가족극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어쩌면 먹먹함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그해 봄, 다시 민들레 꽃이 피었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말미에 영화는 일상으로 돌아온 민초들의 모습을 비춘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이 지나면 민들레 꽃이 피는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일방적인 결론을 강요하기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관객을 괴롭히지만, 그래서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