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로 깜짝 데뷔한 피아니스트 김선욱

피아니스트 김선욱(29)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배우'로 깜짝 데뷔했다. 13일 부산국제영화제 '한국 영화의 오늘' 부문을 통해 처음 공개된 영화 '황제'(감독 민병훈·이상훈)에서 피아니스트 역으로 출연한 것. 그는 이날 시사회 직후 소감 발표 자리에도 감독·출연진과 함께 나왔다. 김선욱은 "영화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연기할 줄도 모르고, 연기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감독님들께서 시키는 대로 걸어가거나 돌아보았을 뿐"이라며 웃었다.

고통과 좌절, 상실감에 시달리는 젊은 남녀 3명이 함께 여행에 나선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실험적인 예술 영화에 가깝다. 전문 배우들이 대사와 독백을 맡았고, 김선욱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와 피아노 소나타 '비창' '월광' 등을 연주하는 모습을 찍었다. 이탈리아와 헝가리·영국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거나 독주회를 여는 모습을 현지 촬영했으며, 연주회를 앞두고 홀로 연습하거나 리허설하는 장면도 담았다. 영화에서 그는 파도 치는 해안가와 폐허가 된 건물을 조용히 걷기도 한다.

이 때문에 김선욱의 출연 분량은 상영 시간(88분)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많지만, 정작 대사는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피아노 연주 외에는 연습 도중에 길게 내뱉는 한숨이 그의 유일한 '소리'다. 영화에서도 피아니스트라는 본업(本業)에 충실했던 셈이다.

음악 애호가인 민 감독이 4년 전 서울시향 연주회에서 김선욱의 '황제' 협연을 본 뒤 영화 출연을 제안했다. 민 감독은 "당시 연주를 보면서 음악에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면, 영화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민 감독의 말처럼 영화에서 방황하던 젊은 남녀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브람스의 '간주곡'을 연주하는 김선욱의 피아노를 둘러싸고 경청한다. 김선욱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연주자가 사실상 모든 걸 끌고 가야 하는 음악과 달리 영화는 배우와 감독, 스태프까지 수많은 사람의 열정과 노고가 들어간다는 걸 이번 작업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제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