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심이기에 가능한 그 '엄마'

"맞아요. 복도 없어요. 남편도 없어요. 애는 또 얼마나 많이 낳아 놨는지. 그래도 늘 씩씩한 엄마였어요. 그런 역할에는 정말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아요, 하하."

배우 고두심(66)은 늘 '서민 엄마'였다. 부잣집 마나님보다는 가난한 집 또순 엄마 쪽이고, '어머니'보다 '엄마'라 불러야 어울리는 배우. "귀부인도 잘할 수 있는데…" 하며 슬쩍 웃는데, 조금 짙게 화장을 했어도 그는 여전히 '엄마'다. 9일 영화 '채비'(감독 조영준) 개봉을 앞둔 그를 지난 31일 기자 간담회에서 만났다. 이번에는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발달장애 아들 '인규'(김성균)가 혼자 살아갈 수 있게 가르치려 고군분투하는 엄마 역할이다. 영화 속 그는 가슴을 움켜쥐는 몸짓 하나, 무심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로, 평이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에 감정적 강약의 리듬을 입히고, 관객 가슴을 뒤흔든다. "역시 '국민 엄마' 고두심답다"고 했더니 손사래를 쳤다. "그런 별명은 너무 무거워요. '전원일기' 맏며느리로 보낸 22년이 고두심을 만들었지만, 고두심을 옥죄기도 했고요." 그는 '채비'에 대해 "겨울을 따뜻하게 해 줄, 가족과 보며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고 했다. "한 번쯤 쉼표 찍듯 돌아보고, 가족의 단단한 힘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꽃보다 아름다워' '춤추는 가얏고' '마당 깊은 집' '사랑의 굴레'…. 기억 또렷한 드라마 출연작 목록은 일일이 다 꼽기 어려울 만큼 긴데, 영화 출연은 드물었다. 그는 "오래 집 떠나 촬영하기도 어렵고, 큰 화면에 내 일거수일투족이 담기는 게 두렵기도 하더라"고 했다. 박찬욱 감독이 고두심을 영화 '친절한 금자씨' 주인공으로 생각하며 각본을 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 그는 "박 감독님 밉다"며 웃었다. "아우~, 얘기나 하지 말지. 한 번 만나서 물어보고 싶어요. 나도 되는데. '너나 잘하세요~' 하하."

고두심은 "참 오래 쉬지 않고 일했다"고도 했다. "드라마 한 편 찍으면 6개월, 두 편 찍으면 1년이에요. 세월 가는 줄 모르다가 낙엽이 차 바퀴 휘감으며 구르는 걸 보며 가을이구나 깨닫기도 하고. 영화 찍고 오랜만에 쉬는 지금이 건강도 돌보고 다시 뛸 채비하는 시간 같네요."

후배 연기자들에게 아쉬운 건 개성을 지우는 성형수술. "아들 딸로 나왔던 사람도 못 알아봐요. 다들 어디 똑같은 데서 하는 건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어." 그는 "김영옥, 나문희, 김혜자 등 선배들 생각해보면 다 그만의 향기가 있다. 거기서 자기만 할 수 있는 역할도 생기는 건데, 젊은 배우들 얼굴이 다 비슷해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30일 사고로 숨진 배우 김주혁 얘기를 할 땐 살짝 눈물을 비쳤다. "아까 인터뷰 사진 다 찍고는 '주혁아, 너는 갔는데 나는 웃고 있다' 그랬어요. 그게 인생이잖아요. 세상이고, 소용돌이고. 따뜻하게 겨울옷 한 번 입혀주고 싶었는데…."'배우'고두심이 다시 '엄마'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