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핵과 싸우던 젊은 의사 김용, 어떻게 WHO를 바꿨나

1983년 미 하버드대 의학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던 폴 파머(58·현 하버드대 교수)는 아이티의 오지 '캉주'에서 결핵 퇴치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건넛마을에서 대여섯 시간씩 걸어온 환자들로 진료소는 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진료소에는 변변한 검사실조차 없었다. 파머는 빈곤과 질병 속에 방치된 환자들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파머는 대학원 입학 이후에도 평일 나흘간 학교 수업을 몰아서 듣고, 목요일 오후가 되면 아이티로 날아가 봉사 활동을 했다. 동갑내기 대학원 동기생인 김용(현 세계은행 총재)과 고민을 나눴고, 다섯 살 연하의 영국 여성 사회운동가 오필리아 달(Dahl)도 의기투합했다. 세계 보건 의료계의 '삼총사'가 탄생한 것이다.

9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벤딩 디 아크(Bending The Arc)'는 세계 보건 의료계와 구호 활동에 획기적 전환점을 가져온 이들 세 명의 궤적을 뒤쫓는다. 이전까지 세계 구호 기구의 활동은 적극적인 치료보다는 소극적인 예방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세계 의료계의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면서 아이티의 오지 마을로 직접 들어가 치료 활동을 벌였다. 전문가들은 '치료약이 비싼 데다 완치까지 오랜 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속적 성과를 거두기 힘들 것'이라는 냉소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치료제가 잘 듣지 않는 다제내성(多劑耐性) 결핵 환자의 80% 치료 성공'이라는 결과를 1998년 결핵학회에서 발표했다. 이들의 헌신적 활동은 세계보건기구(WHO)의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이 다큐에서 극적 갈등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도 낙관주의와 이상주의로 경도돼 있어 드라마적 재미는 덜한 편이다. 하지만 아이티에서 시작된 이들의 의료 운동은 남미 페루와 아프리카 르완다 등 세계 전역으로 퍼지면서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들이 싸우는 질병도 결핵에서 에이즈와 에볼라 바이러스로 점차 늘어난다. "낙관주의는 도덕적 선택"이며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를 동시에 가져야 할 때"라는 김용 총재의 인터뷰는 묘한 감동을 불러온다.

이들의 신념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이상론과 현실적 불평등 사이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는 점만으로도 다큐의 의미는 충분하다.

할리우드 배우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공동 제작했다. '본 아이덴티티'의 배우인 맷 데이먼은 지난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폴 파머와 김용, 오필리아 달은 나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이상과 꿈을 잃고 각박한 현실에 내몰리는 이 땅의 젊음에게 권하고 싶은 다큐멘터리. 아무리 무서운 질병도 '희망 바이러스'처럼 전파력이 강할 수는 없다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