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케스를 세 번 읽고 물었다 "神이여, 인간이 쓴 게 맞습니까"

유쾌한 입담으로 이름난 젊은 시인 서효인(36)이 지난주 발표한 올해 대산문학상의 시 부문 수상자가 됐다. 수상 시집은 '여수'(문학과지성사), 상금은 5000만원. 여수는 물론, 마산 철원 익산 파주 등 이 땅 여러 곳을 직접 발 디디며 글로 옮긴 성실한 기록이자, 읽기와 쓰기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최전선 중 하나다. 이 부지런한 시인은 문인 야구팀 '구인회'의 주전 포수였고, 지난달 기아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눈물 흘린 감성 야구팬. 대외 공개용 말고 조금은 내밀한 책 고백, 오늘은 대산문학상 수상자이자 '포수 시인' 서효인이다.

-나를 시인으로 이끈 책이 있다면.

"단연 백석의 시다. 가볍게 읽기 시작했던 '백석 시 정본'에서부터 대학원 시절 논문 쓰는 흉내를 낸다고 파고들었던 '백석 전집', 최근 출간된 '백석 평전'에 이르기까지. 고백하건대 고등학교 문학 참고서에 지문으로 실린 백석의 시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모닥불'이라는 시였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는 구절로 끝나는데, 마지막 명사가 '사연'이 아닌 '역사'다. 이 한 단어의 도약이 그때나 지금이나 몹시 좋다. 시인이 되고 싶을 정도로 좋다."

-고전 중에서 내가 썼으면 좋았을걸, 하고 바랐던 책이 있는지.

"학부 시절 글 좀 쓴다고 한창 나대고 있었는데, 전공 교수님이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읽어 봤냐고 물어왔다. 안 읽어서 안 읽었다 답하니 '교수는 그것 참 안된 놈이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모종의 굴욕감을 느낀 나는 '백년의 고독'을 독파하기 시작하는데… 연달아 세 번을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나는 신에게 물었다. 이 작품이 과연 우리와 같은 종(種)이 쓴 게 맞습니까? 이후 무식한 독자인 나에게 경이로운 작품은 매번 새롭게 나타났지만, '백년의 고독'은 최초의 경이로움이다. 불가능임을'애저녁'에 깨달았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경이가 되었으면' 하는 헛된 망상을 하던 시절도 잠시 있었다."

-가장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책.

"내 친구 시인 오은의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이다. 주위의 누구도 과소평가하지 않는 책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독자에게 가 닿지 못했으니 과소평가라고 해도 될 것이다. 심지어 한 여행사에서 책 제목과 같은 문장으로 광고 메인 카피까지 뽑았으나, 세상은 아무 일 없이 돌아갔다. 이 책은 '시인이 쓰는 산문집'이라는 정형성을 벗어나 있다. 이 책은 미술이라는 분야, 더 나아가 색이라는 물질에 대한 언어의 도전이며, 시적 언어로 빚어 펴낸 그럴싸한 미학이며, 오은만이 쓸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작업이다. 너랑 나랑 노랑은 올해에 읽을 만한 책이다."

-당신은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야구에 관한 최고의 책은.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야구 보면서 아니꼬운 잘난 체를 할 때 저 책을 여러 번 읽은 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딱 하나만 다시 꼽으라면 김경욱 작가가 쓴 동명의 장편소설 '야구란 무엇인가'로 선회하겠다. 타이거즈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태생에 더욱 저릿한 울림이 있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사실 야구와 별로 상관없이 흘러간다. 단 한 장면이 있다. 호랑이와 곰의 경기를 지켜보는 잠실구장에서 아들과 사내 그리고 9회말. 소설이든 야구든 결과를 미리 알면 시시한 법이니 여기서 줄이겠다. 다만, 올해 프로야구 우승 팀은 타이거즈다! "

-내 책장에 있다면 사람들이 놀랄 책은.

"박경리 작가의 '토지', 1권을 제외한 전권. 1994년판이니 완간 후 어머니가 사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가장 중요한 1권은 어느 허랑방탕한 습작생 후배에게 빌려주었다가 잃은 듯하다. 내게 일말이라도 문학적인 타고남이 있다면 대부분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번뜩이는 창작자보단 성실한 독자에 가까웠다. 출판계에 귀한 캐릭터다. '닥터 노먼 베쑨'에서부터 '사조영웅전'까지 온갖 장르의 갖가지 책이 좁은 집 한구석을 차지했다. 그중 대하소설이 압권이었다. '토지'는 물론이고 '아리랑' '태백산맥' '혼불' '장길산' '여명의 눈동자'…. '토지'는 고등학교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다 읽었다. 다행히 그해 문학 교과서에 실려 큰 제지는 없었다. '토지'를 읽던 밤에 시인으로는 물론 사무원으로서 끈질김도 생긴 게 아닐까 싶다."

-나를 울게 만든 최근의 책은.

"책을 읽다가 물리적인 실제 '눈물'을 떨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은 아무래도 감성보다는 이성에 기대는 녀석이고, 설령 최루성 페이지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그 페이지를 넘기면 그만이니까. 그나마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가능하려나. 앤서니 도어의 퓰리처상 수상작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그렇다. 1943년 눈이 멀어 가는 한 소녀로부터 시작한 소설은 2014년, 2차 세계대전을 지나쳐 한 세기를 목격한 노파의 목소리로 끝난다. 1944년에 있었던 한순간의 만남이 그녀의 삶을 구했다. 그것은 희미하고도 묵직했던 전자파 하나로 가능했는데, 2014년 벤치에 앉아 있는 노파의 주위에는 그 수백만 배의 전자파가 사람들을 감싸고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떠올리며 나는 잠깐, 그리고 오래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