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힘 뺀 산수화… 글자, 山과 물이 되다

'죽이도록 주기도문'을 봤을 때의 놀람과 폭소를 기억한다. 먹으로 그린 산수화인 줄 알았더니 주기도문을 반복해 쓴 수만 개 글자의 집합체다. 산과 계곡의 음영을 나타낸 건 먹의 농담이 아니라, 펜으로 깨알같이 적어내려간 글자들의 밀도! 가로 세로 2m 대작이니, 그야말로 '죽도록' 주기도문을 써내려간 작가의 노고와 결벽, 강박이 온몸을 엄습했다.

일명 '글자 산수화'를 창시한 이 괴짜 화가의 이름은 유승호(43). 1997년 글자로 형상을 만드는 실험에 착수, 1999년 '야~호'라는 손 글씨를 반복해 산수화를 처음 선보였고, 2000년대 들어서는 북송시대 곽희 범관, 조선의 안견 정선의 걸작을 모티브 삼은 대형 글자 산수로 화단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술시장엔 2005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추정가보다 2배 높은 7만2000달러에 낙찰되면서 등장했다.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고, 올해 홍콩 아트바젤을 비롯해 아부다비 아트페어에서 2년 연속 완판 행진을 기록했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올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서 유승호 신작을 구입했다.

유승호의 진가는 고상한 산수화를 만화처럼 가볍고 코믹하게 패러디하는 능력이다. 이달 30일까지 서울 경리단길 'P21 갤러리'와 청담동 '박여숙 화랑'에서 동시에 열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시는 전통을 경외하면서도 유쾌하게 갖고 노는 젊은 작가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보여준다.

박여숙 화랑엔 '유승호 표' 글자 산수들이 걸렸다. '땡벌, 가자가자 피안으로' '유~후' '나 잡아 봐라' '세월아 돌려다오' 같은 제목의 산수화들이 관람객을 즐겁게 한다. "동양화 하면 지루하고 고루하다는 편견에 뒤통수를 때리고 싶었죠. 멀리서 보면 숭고한 산수화인데 가까이 가서 보면 빵 터지는 반전을 노렸달까요." '콩심고 팥심고'는 고향에서 농사짓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린 작품이다. "화폭 가득 좁쌀 같은 글자를 쓰고 또 쓰는 제 모습이 밭이랑에 콩 심고 팥 심느라 비지땀 흘리는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P21 갤러리엔 보다 기발하고 실험적인 언어유희 작업들이 걸렸다. 펜 대신 붓을 들고 초서를 활용한 붓글씨 작품들이다. 3m 길이 주황색 바탕에 풀 초(艸)와 뫼 산(山) 자를 휘갈겨 쓴 작품 '초 fool'은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현판에서 영감을 얻었다. "추사가 우뚝 서야 할 산(山)은 바람에 휜 듯한 형태로 쓰고 풀 초(艸) 자는 삼지창처럼 곧게 선 형태로 쓴 것이 당대의 정치 상황을 빗댄 것이라는 얘기가 인상 깊어 작업해봤지요."

흥(興)이란 한자를 왕희지체로 써서 뒤집은 뒤 날아가는 모습으로 그린 '흥이 난다'를 비롯해 바람에 버드나뭇잎 떨어지는 모습을 '우수수수'란 글자로, 빗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주루루룩'이라는 글자로 표현한 작업도 별미다. 깨알 글자들이 바람처럼 물처럼 번지며 살아 꿈틀거린다.

남양주의 한 우사(牛舍)에서 작업하다 인기 작가 된 뒤 서울 강북으로 옮긴 유승호는 "하루 6시간, 비트가 강한 음악을 들으며 글씨를 써내려간다"고 했다. "정신줄을 살짝 놓아야 가능한 작업이거든요, 흐흐. 어느 땐 핑크 플로이드의 비트가 스님들 목탁소리처럼 들려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한성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막둥이라 외로웠던 유년기, 농사일하던 어머니가 글자 산수에 영감을 주었단다. "초등학교를 다니다 만 어머니의 글씨는 어린아이처럼 비뚤배뚤했지요. 그 못났지만 따뜻한 글씨를 흉내낸 작품이 이번 전시에도 걸렸어요. 근데 요즘 마을회관에서 한글을 다시 배우면서 이전 글씨 맛이 사라져 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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