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보다 뜨거운 119일

21일 소방청은 개청 119일을 맞이했다. 소방청은 지난 7월 25일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국민안전처로부터 독립했다. 1975년 소방국(내무부 소속)으로 출발해 42년 만에 독립 조직이 생긴 것이다. 소방청의 독립은 4만여 소방공무원들의 오랜 염원이었다.

◇개청 119일, 4만986명 살렸다

지난 119일 동안 소방관들은 7.9초에 한 번꼴(129만8836회)로 출동해 4만986명의 생명을 살렸다. 소방청장 1호 표창자는 전남 완도 탱크로리 전복 사고에서 폭발 위험을 감지하고 40여 명을 대피시킨 김평종 해남소방서 119안전센터장이었다. 지난 9월 전남 완도군의 도로에서 16t 탱크로리 차량과 25t 덤프트럭이 추돌했다. 탱크로리 차량에 달린 LPG 통에서 가스가 새면서 높이 3m의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는 가스가 분출할 때 나는 '슈웅' 하는 소리를 듣고 폭발을 예감했다. 김 센터장은 "주변 사람들을 전부 200m 밖으로 대피시키라"고 지시해 폭발하기 5분 전 40여 명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진화 작업에만 매달렸다면 수십 명의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살인·폭행 등 강력 사건 현장 뒤에도 소방관이 있었다. 지난달 21일 청주의 한 상가 건물에서 대학생 김모(25)씨는 자신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대학 동기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목과 쇄골 부위를 찔려 피를 흘리던 피해자는 지나가던 소방관의 응급조치로 생명을 구했다. 인천 부평소방서 조경훈 소방사는 휴일을 맞아 청주에 내려왔다가 피해자의 비명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조 소방사는 외투로 상처 부위를 지혈했고 시민에게 신고를 부탁하는 등 빠른 응급조치로 피해자를 살렸다.

생명을 구해내는 소방관들의 분투는 자신의 고통을 뒤로 한 희생의 결과다. 지난 20일에는 29년차 베테랑 소방관이 불길을 피해 3층 건물에서 뛰어내린 어린 남매를 맨손으로 받아냈다. 인천서부소방서 원당 119안전센터장인 정인근(54) 소방경은 인천 서구의 다가구 주택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 아파트 주민들과 어린 남매가 계단 창문 앞에서 소방대원들을 향해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정 소방경은 시커먼 연기를 보고 에어 매트를 깔 시간도 부족하다고 판단해 "내가 밑에서 받을 테니 아이부터 내려 보내 달라"고 했다. 정 소방경은 4m 높이에서 떨어지는 3세, 5세 아이를 차례로 받아냈다. 그는 지난달 신장암 수술을 받아 몸무게가 56㎏로 줄고 허리에 복대를 찬 상태였다.

◇석란정 화재 진압하다 두 소방관 순직

119일 동안 벌써 두 명이 순직했다. 지난 9월 강원 강릉시에서 60년 된 목조 정자 석란정에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다 붕괴한 건물 잔해에 매몰돼 이영욱(59) 소방경과 이호현(27) 소방교가 순직했다. 두 소방관이 정년퇴직을 1년 앞둔 최고참과 소방관에 임용된 지 8개월 된 새내기 소방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영결식에서 조사를 읽던 허균 소방사는 "우리는 당신들의 몫까지 열심히 할 것입니다. 평생 당신을 잊지 않을 겁니다"라며 흐느꼈다. 소방관의 평균 수명은 67세로 일반 국민 평균 수명보다 14년이나 짧다.

공상자(공무 중 다친 사람)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2014년 325명에서, 2015년 376명, 2016년 448명으로 증가 추세다. 개청 후 지금까지는 125명의 공상자가 발생했다. 지난 9월 경기 광주의 포장 제조 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21명이 다쳤다. 이 중엔 소방관 3명도 포함돼 있었다. 광주소방서 조준형 소방사 등 3명이 화상과 얼굴 타박상을 입었다. 지난 8월 강원도 홍천에서는 소방대원들이 불길에 휩싸인 집에서 30대 여성을 구하다가 화마에 장갑이 뚫려 양손에 2도 화상을 입기도 했다.

지난 11월 9일 소방청 개청 이래 처음 맞이한 '소방의 날'에도 많은 이가 순직한 소방관들을 기렸다. 순직소방관추모관 사이트가 열려 많은 네티즌이 온라인상으로나마 분향과 헌화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제 55회 소방의 날 기념식'에서 "더 이상 소방관들에게 사명감과 희생만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면서 "소방관 처우 개선을 위해 국가가 나서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