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마음 졸인 수능 "고생했어 우리 딸"

23일 오후 5시 경북 포항시 북구 유성여고 앞에는 수백명이 모여 있었다. 일주일 미뤄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나올 수험생을 기다리는 가족과 친구들이었다. 유성여고는 지난 15일 포항 지진의 진앙에서 가장 가까운 고사장 중 하나다. 오후 5시 10분쯤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한두명씩 나오기 시작했다. 교문 앞은 반가움으로 술렁였다. 아버지는 수험생 딸을 찾아내 "수고했다"며 안아주고, 어머니는 "고생했다"며 울먹였다. 여기저기서 안도와 응원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일주일 전 덮친 지진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포항의 고3 수험생 5500여 명은 이날 대체로 차분하게 시험을 치렀다. 아침 일찍부터 포항의 12곳 고사장 주변으로 조용한 응원 부대가 모여들었다. 예년처럼 플래카드를 들고 요란하게 응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반가운 얼굴이 보일 때마다 "○○야 힘내"라며 소리를 지르거나 힘껏 손을 잡아주는 이들이 많았다. 친구들을 응원하러 '힘내 파이팅'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나온 중앙여고 3학년 문보람양은 "친구들이 수능보다 지진 날까 봐 걱정을 많이 한다"며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 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오전 포항에서는 규모 2.0 이하의 지진이 4차례 발생했다. 일반적으로 체감하기 어려운 작은 규모였다. 유성여고에서 시험을 치른 수험생 김혜경양은 "지진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시험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김지영양은 "시험 보는 동안 큰 지진이 안 나서 다행"이라며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한 것 같아 홀가분하다"며 웃었다.

포항여고에서 시험을 치를 예정이던 수험생 587명은 고사장이 이동중으로 재배치됐다. 이동중은 2교시 수학영역 시험이 치러지던 오전 11시쯤 조명이 일시적으로 꺼졌다가 켜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수험생들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재수생 김가연양은 "다들 차분히 시험을 치렀다"며 "쉬는 시간에 '지진이 아니었다'는 안내방송이 나와 안도했다"고 했다. 영일고 3학년 심화영양은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못 느꼈다"며 "감독관들도 지진이라는 말이 없어 시험에 집중했다. 학교에서 지진 대처 요령을 숙지한 덕분에 당황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사고에 대해 한전 측은 "선로 설비 이상으로 순간적으로 전압이 떨어져 생긴 일이며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고 밝혔다.

일부 수험생이 고사장을 잘못 찾아가는 소동도 있었다. 지진 피해가 상대적으로 심했던 북구 지역 포항고·대동고·장성고는 진앙에서 멀리 떨어진 남구의 학교로 고사장이 변경됐다. 그런데 예비소집은 변경되기 전 고사장에서 실시했다. 혼동한 수험생들을 싣고 순찰자가 변경된 시험장으로 데려갔다. 다행히 고사장 변경으로 수능을 못 치른 수험생은 없었다.

바다 건너 포항으로 수능을 보러 온 울릉고 수험생들도 무사히 시험을 마쳤다. 울릉도의 유일한 고등학교인 울릉고 3학년생 34명은 수능을 치르기 위해 지난 10일 포항으로 건너왔다. 지진으로 수능이 일주일 미뤄져 뜻하지 않게 객지 생활이 길어졌다. 학생들은 해군회관을 숙소 겸 도서관 삼아 지내며 문제집을 풀었다. 대체시험장인 남구 이동중에서 시험을 치른 울릉고 한보람양은 "시험을 예상보다 일주일이나 밀려 치느라 힘들었지만, 마치고 나니 후련하다"며 "내일도 풍랑주의보로 배가 못 뜬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