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1.23 16:37

[나의 사적인 서가] 임지현 서강대 교수
시집 '화사집'은 내 길티플레저 죄의식 느끼며 즐겨
움베르토 에코에게서 웃으며 화내는 법 배워
민족주의자들이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어라

임지현 서강대 교수
지적·사상적 편력이라면, 서강대 사학과 임지현(59) 교수의 궤적 역시 동세대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것 같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다가 사후에 건국훈장을 받은 가계(조부 임원근·1899~ 1963)는 제쳐 두더라도, 그 자신 청년 시절에는 열혈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하지만 폴란드 현지에서 동구 사회주의 붕괴를 목격한 1990년대 이후, 그는 편협한 진영주의자와 국수적 민족주의자 양쪽 모두를 비판해왔다. '대중독재' '일상적 파시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등이 그 리스트의 일부. 학문적으로는 냉정하지만, 동시에 그는 서정주와 보르헤스에 감탄하고, 밀란 쿤데라에게 눈물짓는 문청이기도 하다. 대외 공개용 말고 조금은 내밀한 책 고백, 오늘은 문인이 아니라 문학을 편애하는 학자 차례다.

가장 여러 번 읽은 소설은

여러 번 읽은 소설은 여럿이다. '가장 여러 번'인지는 세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직도 간혹 손이 가는 소설은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이다. 역사와 허구, 사실과 거짓, 역사적 재현과 문학적 상상 사이에 놓여 있는 회색지대를 민첩하게 누비고 다니는 보르헤스의 행보에 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도망 노예 사냥꾼인 사이비 구세주, 죽은 아들을 자처한 사기꾼, 중국의 여자 해적, '기타 등등' 보르헤스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역사적으로 재현된 그의 주인공들은 실제 삶의 현장이 얼마나 많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천연덕스럽게 보여준다.

당신이 읽은 최고의 자서전·전기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시인의 죽음'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파르르하다. 어린 시절 기차 안에서 만난 아버지 친구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하여 톨스토이와 스크리야빈에 대한 개인적 추억들을 시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는 그의 자서전은 유신독재와 5공의 야만에 짓눌려 있던 내 청춘의 큰 위안이었다. 바다만큼 많은 양의 보드카를 마셨다는 전설의 혁명 시인 마야콥스키를 처음 접한 것도 이 책에서였다. 책은 어디선가 잃어버렸지만, '분노와 좌절 속에서'라는 폴란드 연극 포스터 속의 마야콥스키는 아직도 그 왕방울만 한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째려보고 있다.

최근 나를 울게 한 책 중 대표적 작품은

세월이 가면서 마음이 젖는 일은 점점 없어진다.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나 날카로운 햇살에 눈이 시려 눈물이 날 때가 더 많다. '최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최근'에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 때문에 울컥했던 적이 있다. 여자 친구를 놀래려 엽서 말미에 적은 '트로츠키 만세!' 농담 한 구절 때문에 생이 망가진 젊은 청년 루드빅의 이야기는 농담보다도 못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스탈린의 전기를 쓰면서 수도 없이 그 시절로 돌아가 스탈린을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는 터커(Robert C. Tucker)의 분노보다 쿤데라의 농담이 더 쓸쓸하고 슬프다.

나를 웃게 한 책 중 대표적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웃으면서 화낼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예컨대 면허증을 분실해서 천신만고 끝에 임시면허증을 발급받은 후 에코가 정부에 제안한 면허 발급 시간 단축안을 보라. 몇 시간 만에 가짜 운전면허증 수십 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붉은 여단 테러리스트들을 면허국에 고용해서 면허증 발급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또 건전 노동을 통해 사회에 동화시킴으로써 건전 사회를 만들자는 제안은 참으로 기발하다. 이런 제안들은 현실화시키기 어렵다는 약점만 극복하면, 트럼프조차도 재선시킬 수 있는 '창조경제'의 바탕이 된다.

죄책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남몰래 즐기는, 나의 길티플레저 책은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 슬슬 달이 차오르는 젊은 날의 그 저녁들, '석유먹은 듯… 석유먹은 듯 가쁜 숨결'의 내 '징그러운 몸뚱어리'는 '병든 수캐마냥' '붉은 울음을 밤새 울면서' '웃음짓는 짐승, 짐승 속으로' 들어가고는 했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화사집'의 관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죄의식 없이는 불가능했다. 5공 시절 '말당'의 정치적 백치미가 만천하에 드러나면서부터는 더 그랬다. 그래도 조선말이 몸서리치게 관능적일 수 있다는 경지를 보여준 미당의 헐떡거리는 피에 때때로 술 한잔 건네고 싶다.

나를 역사학으로 이끈 책 중 지금도 권하고 싶은 책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풍요로운 오류'가 '황폐한 진실'보다 소중할 때가 있다. 학부 졸업반 시절 영역판으로 읽은 앙리 피렌의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풍요로운 오류를 처음 배웠다. 지중해가 '이슬람의 호수'로 변해버려 고전고대의 그리스·로마적 전통이 단절되고 자기 충족적이고 폐쇄적인 봉건 유럽이 성립되었다는 그의 논지는 실증적 논란에도 웅장한 스케일과 세계사적 전망, 유려한 문장과 균형 잡힌 해석 등 역사 서술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피렌의 발치까지만 갈 수 있다면 "틀려도 좋다"라는 생각이 서양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였다.

민족주의가 지고지선이라고 믿는 민족주의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서양 책을 예로 들면 서양 오랑캐의 책이라고 민족주의 비판을 비껴가는 분들이 꼭 있는 까닭에 이 책으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강추! 오랑캐의 문물을 직접 목도하고는 북벌론을 북학론으로 바꿔치기하는 사고의 유연성, 중국의 제일 장관은 깨진 기왓조각과 똥 덩어리에 있다는 현실 감각, 코끼리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사물과 자연에 대한 호기심, '상투'처럼 케케묵은 아집에 대한 부끄러움. 한반도의 민족주의자들이여, 연암의 범에게 호구 잡히지 말라.(박지원은 양반을 풍자하는 단편소설 '호질'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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