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의 점진적 개화론, 보수주의의 시작"

"서유견문은 조선 후기 실학(實學)을 계승한 유길준이 개방개혁의 시대였던 1880년대에 풍부한 외국 경험을 바탕으로 내놓은 문명사회 건설론이었다. 근대성을 강조하는 현재적 관점이 아니라 전통을 크게 의식하는 당대의 입장에서 읽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장인성(60)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우리나라 개화기의 대표 저서인 '서유견문(西遊見聞)'을 현대어로 옮기고 상세한 평설(評說)과 해제를 붙인 '서유견문: 한국 보수주의의 기원에 관한 성찰'(아카넷)을 내놓았다. 서유견문은 1880년대 전반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한 유길준(1856~1914)이 갑신정변 실패 소식을 듣고 1885년 말 귀국한 뒤 7년 동안의 연금생활 도중 유학 보고서로 집필했으며 1895년 출간됐다. 세계 지리와 구미(歐美) 각국의 문물, 근대 정치체제, 교육·국방·화폐·납세·종교 등 각종 국가 제도를 상세하게 소개해서 큰 영향을 미쳤다.

서유견문 전체를 관통하는 입장은 실용주의다. 젊은 시절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 문하에서 배운 유길준은 지식과 제도의 평가 기준을 '실리(實理)' '공용(功用)' '공효(功效)' 등 효용성에 두었다. 장 교수는 "유길준에게 개화(開化)는 실학의 1880년대식 표현이었고, 서양문명의 수용도 실학정신의 구현이었다"고 말했다.

서유견문이 주장하는 개화는 점진적이다. 유길준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득중(得中)', 현 제도를 고치고 다듬는 '윤색(潤色)', 서로 경쟁하면서 격려하는 '경려(競勵)'를 강조했다. 군주제를 옹호하고 '충군(忠君)'을 중시했다. 전통을 보존하면서 시세와 처지에 맞는 '변통(變通)'을 추구하는 서유견문이 근대이행기에 등장하는 한국 보수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장 교수는 봤다.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일본 유학 시절 배운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서양사정(西洋事情)'을 많이 참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장 교수는 "요즘 학자들이 구미(歐美)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에 비교하면 유길준은 훨씬 더 주체적이었다"고 말했다. 필요한 부분을 고르고 이를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고쳐 쓰는 방식이어서 독창성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서양사정'은 영국 저술가 존 힐 버튼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을 상당 부분 번역해서 실었다. 장인성 교수는 이를 통해 유길준이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을 접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애덤 스미스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은 상업에 기초한 문명사회론, 야만과 문명의 사회단계설을 주장했고 공동체와 역사를 중시했다. 이런 주장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상황에 잘 맞았다. 장 교수는 "서유견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상인의 대도(大道)' '개화의 등급'에 그 영향이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서유견문의 원문 번역은 유길준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국어문법서 '대한문전(大韓文典)'을 펴낼 만큼 언어에 조예가 깊었던 유길준은 보다 많은 사람이 읽도록 국한문 혼용체로 썼고 개념을 섬세하게 선택했다. 버튼의 'people'을 후쿠자와는 '국민(國民)'으로 옮겼지만 유길준은 '인민(人民)'이나 '국인(國人)'으로 바꾸었다. 백성을 정치 주체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도 근대국가가 아니라 왕조 중심의 '사직(社稷)'이란 뜻이다. 장인성 교수는 "섣불리 요즘 단어로 바꾸면 혼란이 초래되기 때문에 당시 유길준의 언어세계를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