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80년대만 하더라도 일반 서민들이 시청할 수 있는 방송은 MBC, KBS 두 채널 정도였다. 90년대 접어들어 비로소 SBS가 추가되어 3개 채널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위 두 방송국이 7, 80년대를 살아온 국민들의 여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당시 방송국과 시청자와의 관계를 굳이 갑, 을의 관계로 규정해서 보자면, 방송국이 갑이고 시청자가 을의 처지였다. 다시 말하면 방송국이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도할 내용에 대해 취사선택 후 시청자에게 볼거리를 보여주고 시청자는 그냥 아무런 이견도 없이 TV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신뢰하면서 시청하였다. 진위에 상관없이 TV 속에서 두 방송국이 전달하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절이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두 개 채널이 어느 정도 균형을 잡으면서 나름 공정한 방송을 하고자 하는 모습이 있었다. 특히 상대 채널에 자극적인 표현이나 비방은 매우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은 그러했다.
두 방송국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방송을 하다가 SBS라는 신규 방송사가 추가되면서 방송국도 여느 기업들처럼 어느 정도 경쟁 분위기로 가는 듯했다. 비록 한 개 방송국이 추가되었지만 여전히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 일반 서민에게 있는 사실을 그대도 전달하는 긍정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방송국이 2009년 미디어법이 통과되면서 종합편성채널의 등장으로 그야말로 방송국 춘추전국 시대를 맞이하였다.
기업의 가장 우선시되는 덕목은 이윤추구이다. 이윤추구를 위해 기업은 부단히 노력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상대를 위험에 빠뜨리고 경쟁에서 이기는 현상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방송국도 이러한 기본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두, 세 개의 방송국이 종합편성채널의 가세로 10여 개 채널이 되면서 이 많은 채널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타 방송국 대비 더 큰 노력과 차별화된 것이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종국에 가선 여느 기업들처럼 파산으로 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두가 장황하게 길었지만,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두 단어는 절제와 관용이다. 절제란 정도에 넘지 아니하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한다는 의미이며, 관용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의미로 두 단어 모두 중용의 도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최근 사회면을 떠들썩하게 하는 굵직한 사건마다 각 방송사가 경쟁적으로 취재하다 보니 있는 사실에 추가로 없는 사실도 보도하면서 일반 서민들에게 혼란을 가중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시청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영상과 기사를 내보내기도 한다.
방송사는 과거 두, 세 개 채널에서 두 배 이상으로 질과 양이 증가했다. 덩달아 시청자도 방송이 보여주는 현상에 대해 전문가에 버금가는 지식과 판단력을 갖고 냉철하게 분석하고 스스로 그 진위에 대해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만큼 시청자의 수준도 과거 대비 상당히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방송사가 어떤 이슈에 대해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과장된 표현을 한다면 시청자에게 반드시 외면을 당하게 되리라고 본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절제된 말과 영상으로 시청자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청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채널이 될 것이다.
방송사 간 치열한 경쟁으로 타 방송사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상대방을 바로 비난하고 법적으로 대응하고 소송을 벌이는 경우도 보게 된다. 물론 나의 잘못이 없는데 상대방이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참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옛 선인들의 말처럼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사랑받는 진정한 승리자의 길이다.
요즘은 TV 보기가 겁나는 세상이 되었다. TV 채널을 틀자마자 온갖 이슈들이 쏟아지면서 보통 사람이 상상조차 못 하는 사실들을 접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는 내용도 난무한다.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다 이해가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는 정말 절제와 관용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절실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