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에서 협력으로 나아간 역사가 韓日관계"

"지금까지 늘 우리 입장에서만 임진왜란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 보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얼마나 조선 침략을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죠. 일본이 여기서 뭘 생각했을지 떠올려 보니 섬뜩했습니다." 일본 규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 성터를 본 서주석 대전 버드내중 역사 교사가 말했다.

교류의 역사와 침략의 역사는 늘 같은 길에서 일어났다. '당나라(대륙)로 가는 나루'라는 이름처럼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최단거리 맞은편인 일본 규슈의 가라쓰(唐津)에는 얄궂게도 조선 침략의 전진 기지였던 나고야 성터가 있었다. 한·일 교류의 상징과도 같은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던 시모노세키(下關)의 아카마(赤間) 신궁 바로 옆 건물에선 일본의 조선 침략을 노골화한 조약이 체결됐다.

올바른 한·일 관계사를 돌아보기 위한 '일본 속의 한민족사(韓民族史) 탐방'이 지난 10일부터 15일까지 전국 초·중·고 교사 250명 등 모두 3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이 프로그램은 1987년 시작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해설은 손승철 강원대 명예교수와 서정석(공주대)·엄기표(단국대) 교수가 맡았다. 손승철 교수는 "한·일 관계는 만남에서 시작해 대결과 적대 관계를 거쳐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갔던 역사"라고 말했다.

◇기(起)―만남의 역사

"우리 유물 판박이네." 규슈 곳곳의 유물 전시관에서 탐방단의 역사 교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반도 농경 문화가 전래된 흔적인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역사공원은 한·일 만남의 역사가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증언하는 유적이었다. 일본식 전방후원분인 후나야마(船山) 고분에선 무령왕릉 출토 유물과 비슷한 금동관과 금동 신발이 전시돼 있었다.

◇승(承)―교류의 역사

탐방단은 규슈의 신모지(新門司)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의 내해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교토(京都)가 있는 간사이(關西) 지방으로 이동했다. 이 루트는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이동한 길이기도 했다. 고구려인의 흔적은 고구려 벽화의 여인들을 그대로 옮긴 듯한 아스카(飛鳥)의 다카마쓰(高松塚) 고분에 남아 있었다. 백제인의 흔적은 부여의 왕흥사를 모델로 했다는 아스카테라(飛鳥寺), 살포시 머금은 미소가 친숙한 '백제관음상'과 백제계 목탑이 남아 있는 나라의 호류지(法隆寺)가 증언하고 있었다. 탐방단의 감동은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서 절정을 맞았다. 우리 국보 83호와 쌍둥이처럼 닮았으며 신라제(製) 불상이라는 학설이 유력한 '목조반가사유상' 앞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히 불상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전(轉)―대립의 역사

8세기 건립한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는 신라의 황룡사 등을 의식해 만든 대규모 건축물이자, 이제 일본이 독자적 문화의 단계로 들어섰음을 웅변하는 유물이기도 했다. 그 '경쟁'의 관계는 세월이 흘러 '침략'의 칼로 변모한다. 침략의 절정은 1592년 임진왜란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오사카성과 나고야 성터 앞에서 탐방단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결(結)―화해의 역사, 그리고…

"이것이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유물 333점 중 하나입니다." 시모노세키 아카마 신궁에서 일본인 궁사(宮司)가 시(詩)가 쓰인 옛 문서를 들어 보였다. 1711년 이곳을 들른 조선통신사 부사 임수간이 어린 나이로 죽은 안도쿠(安德) 일왕을 추모한 시였다. 근처 바닷가에는 2001년 세운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있다. 손승철 교수는 "믿음[信]을 통(通)하기 위해 12회를 왕복한 통신사의 역사는 약탈과 전쟁의 시대를 공존과 평화의 시대로 바꿨다"고 했다. 하지만 아카마 신궁바로 옆 건물인 청일강화기념관은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지로, 일본은 언제라도 다시 침략의 발톱을 꺼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용서나 화해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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