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좋은 쪽이나 나쁜 쪽이나 인상 깊은 사람을 한두 명쯤은 만나게 마련이다. 이번 여행에도 그랬다. 일행 중에 일흔은 넘어 보이는 노신사 한 분을 만났다. 자세 한 번 흐트러지지 않는 꼿꼿한 몸매가 댄스를 하지 않았나 싶다. 단정히 벗어 넘긴 머리에 옷매무새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뭐랄까? ‘댄디’하구나 할까! 즉 깔끔하고 세련되며 도회적인 느낌이 있는 분이었다. 뉴욕에서 모마 박물관을 가지 않은 탓에 만나게 된 분이다.
무슨 직업을 가지셨는지 젊어서부터 세계를 두루두루 다니신 모양이다. 이번 여행은 40년 만에 들른 여행이라고 하셨다. 젊어서 다녔던 여행지를 다시 돌아보시는 것이란다. 처음엔 말 붙이기도 어려운 분위기라 조심스러웠던 분이다. 그래도 몇 마디 주고받으니 속을 열어 놓으시고 웃어 주셔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했다. 좀 친해지자 그 옛날 링컨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셨다. 사진 속에는 동안의 젊은 청년이 링컨 아래 서 있었는데, 영화배우나 탤런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멋진 분이었다. 어쩌면 그리 변치 않고 젊은 시절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는 감탄했다. 그분의 추억이 담긴 워싱턴엘 갔다.
워싱턴
뉴욕이 상업 도시로 금융의 중심지라면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다. 전 세계가 늘 워싱턴을 바라본다. 미국의 정치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세계도 그에 따라 움직이니 그야말로 세계의 정치 중심지이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인 북한의 김정은마저도 벌벌 떨게 만드는 미국 대통령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런 대통령을 미국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조사한 일이 있었다.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링컨 대통령이고,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케네디 대통령이란다. 나도 케네디 대통령은 좋아하는데 하면서 워싱턴에 입성했다.
세계 정치 1번지 국회 의사당
하얀 둥근 돔으로 이루어진 국회 의사당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무슨 축제가 있는 것인지 마라톤이 열리고 있던 탓이다. 때아니게 덥고 햇살은 강렬했다. 멈추다 걷다 도착한 국회 의사당은 소박했다. 미국이란 큰 나라의 국회의사당이라면 우리를 압도하고 남을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300m 언덕 위에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서 있는 국회의사당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커다란 둥근 돔 위에는 6m 높이의 청동으로 제작된 자유의 여신상이 푸른 하늘 아래 멋지게 서 있다. 북쪽 건물이 상원, 남쪽 건물이 하원이란다. 건물 아래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 잔디밭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펼쳐진다고 한다. 생각보다 너무 소박했다. 웅장하고 화려할 줄 알았는데 전혀 뜻밖이었다. 잦은 테러로 인하여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어 겉에서만 구경하고 발길을 돌렸다.
미 대통령이 사는 곳, 백악관
백악관으로 가는 내내 더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원피스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반팔 입은 사람도 지나간다. 그런데 내가 입은 옷은 거위 털 조끼! 어찌 덥지 않겠는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악관이 보이는 잔디밭에 섰다.
한 마디로 ‘초라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위엄 있으리라 생각했던 기대가 무너졌다. 청와대가 고압적이라면 백악관은 서민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런지 트럼프 대통령이 불만이 많단다. 대궐 같은 자기 집과 비교하니 기가 찼는지 백악관에 살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살겠다고 지금도 우기고 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들으며 트럼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들의 지도자의 생각이 부럽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 같은 사람도 있지만....
스미소니언 박물관
백악관을 둘러보고 돌아서니 아직도 마라톤은 진행 중이다. 달리는 건지 걷는 건지 모를 사람들이 지나간다. 마라톤을 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우승하겠다는 표정은 어디고 보이지 않는다. 그냥 즐기는 모양이다. 그 옆에서는 열띤 응원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달리는 사람보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열심인 이색적인 풍경에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달리는 사람들이 지나가자 스미소니언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시원하다. 이제 살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대한 코끼리 박제와 마주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아프리카 코끼리 박제란다. 그 크기에 순간 압도되던 일행들이 우르르 세계 최대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곳으로 달려간다.
1640년 인도에서 발견된 44.5 캐럿의 블루 다이아몬드 ‘호프’다. 이 다이아몬드를 가지는 자는 모두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다. 그곳에는 330캐럿의 ‘스타 오브 아시아’라고 불리는 사파이어도 보인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님, 나하고는 먼 이야기라 느낌이 없는 걸까? 그저 하나의 돌덩이로 보이는 각종 보석을 구경하고 돌아섰다.
한때는 나도 보석에 목을 맨 적이 있다. 결혼을 막 했을 때 그랬고,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갈 때 그랬다. 그랬다가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보석들이 다 가짜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면서도 사실 언론에서 아무리 그런 얘기를 해도 설마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반지를 사 준다는 남편을 따라 보석상에 갔다. 내 손에서 가장 먼 곳에 빨간 손톱 반 만 한 루비가 보였다. 그것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주인장이 머뭇거린다. 진짜란다. 안다고 그래서 보여 달라는 거라 했더니 하얀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꺼내더니 2,500만 원이란다. 그 앞에서 놀랄 수도 없고 남편 옷자락만 슬며시 잡아당겨 그곳을 나온 기억이 새롭다. 그다음부터다. 내 머릿속에서 보석이란 단어를 몰아낸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