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커스단, 뮤지컬로 부활

20일 개봉한 '위대한 쇼맨'(감독 마이클 그레이시)은 숨 돌릴 틈 없이 경쾌하다. 스크린과 무대의 장점을 모두 지닌 이 영리한 뮤지컬 영화는 "괜찮아, 너는 지금 이대로 좋아" 하고 관객을 위로하는 듯한 느낌도 준다. 연말에 어울리는 온기다.

19세기 한때를 풍미했던 쇼비즈니스맨 P.T. 바넘(1810~1891)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장애인을 볼거리로 내세운 서커스. 허풍쟁이 사기꾼과 수완 좋은 사업가 사이를 오갔던 바넘은 미국에서도 논쟁적 인물이다. 자칫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부담을 안고 출발한 셈이다. 각본가 빌 콘돈은 이 지점을 영리하게 파고든다. 그는 에마 왓슨 주연 '미녀와 야수'의 감독이자, '드림걸스' '시카고' 등 뮤지컬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그는 한 사업가의 실패담을 '출신·계층을 극복한 아메리칸 드림' '가족애에 관한 판타지 동화'로 재해석한다.

수염 난 여자, 난쟁이 장군, 들개 인간 같은 서커스 공연단은 바넘의 돈벌이에 수동적으로 이용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넘의 꿈에 능동적으로 동참한다. 영화 속 노래 '이게 나야(This Is Me)'를 함께 부르며 "난 내가 자랑스러워, 숨지 않아, 이게 나야!'라고 외친다. 하층민 출신의 열등감에 찌든 바넘 역시 잘못된 선택과 실패를 거치며 "행복을 위해 필요한 건 사랑하는 몇 사람뿐"이라는 아내의 말이 가진 뜻을 깨닫는다.

이 착한 이야기를 떠받치는 것은 음악과 춤의 힘. 제작비 8400만달러(910억원)짜리 영화를 새로 쓴 오리지널 곡으로 온전히 채웠는데, 처음 듣는 노래들인데도 귀에 착착 감긴다. 서민들이 열광했던 허름한 서커스는 고급스러운 브로드웨이형 뮤지컬 무대로 다시 태어난다. 현대와 고전 무용의 안무 요소를 뒤섞고, 성가대 합창곡 같은 웅장함을 힙합 비트에 실어 띄운다. 서커스 단원들이 함께 추는 군무(群舞)와 합창은 박진감 넘친다. 바넘의 서커스 동업자 '칼라일'(잭 에프론)과 흑인 여성 공중곡예사 '앤'(젠다야)이 함께 날아오르는 춤과 노래는 애절하다. 이 영화의 백미다.

이런 영화적 성취는 올스타 제작진이 있어 가능했다. 촬영감독은 '녹터널 애니멀' '어톤먼트'를 찍은 시머스 맥가비. 패션지 보그가 '빛의 마에스트로'라 부른 실력자다. '덩케르크' '인터스텔라' '다크나이트'를 만든 미술감독 네이선 크로울리의 세트와 미술도 빼놓을 수 없다. 노래 가사는 '별들의 도시(City of Stars)' 등 '라라랜드'의 노래로 오스카 주제가상을 탄 작사가들이 썼다. 노래도, 색감과 빛도, 무대와 미술도 할리우드 최고들의 작품이다.

다만 여전히 매우 미국적인 이야기가 우리 관객 정서와 제대로 공명할지는 미지수. 휴 잭맨이 연기한 바넘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성공, 열정과 집념, 동료애와 가족 사랑 같은 보편적 가치의 상징이다. 하지만 때때로 '노래하는 울버린'처럼 보인다. 감정 표현도 힘찬 목소리도 수퍼 영웅 같은 근육질 느낌. 피부색과 장애를 뛰어넘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주제 의식 역시 바깥보다 미국 내에서 더 잘 통할 것이다. 상영시간 104분, 12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