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겨울 외투를 두 벌 건졌다. 자칫 의류수거함 신세가 될 뻔한 것을 살려 입게 됐기에 ‘건졌다’이다. 나이 들수록 구닥다리 같아 뵈는 옷은 피해야 하는데, 요즘 감각에는 좀 떨어지는 듯해서 처분하려던 빨간색과 진회색 롱코트다. 동대문에서 오래 옷 장사를 하다가 얼마 전 접었다는 이웃의 “예전 옷 버리지 말라”던 당부 덕분이다. “비싼 옷이든 싼 옷이든 요새 옷은 옷감 질이 떨어지니까 고쳐 입는 게 최고”라고 했다. 게다가 ‘롱’이 다시 득세 중이라 건져볼 궁리를 하게 됐다.
수선집에 맡기지 않아도 나의 ‘생산적인 취미’를 발휘하면 그만이다. 바느질을 좋아하고, 특히 옷 고치기를 즐겨한다. 잡념을 다 잊고 몰입하게 되고, 결과물로 흡족해지며, 새 옷 구매에 눈을 돌리지 않아도 된다. 득이 많은 취미다. 가족들이 “웬 궁상?”이냐고 놀려도 상관없다. 20대에는 치마며 바지는 물론 투피스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이제는 이따금 있는 옷을 손보는 정도다. 조금이라도 내 바늘이 간 옷은 이상하게 정이 가서 두고두고 입게 된다.
바느질을 즐기려면 무엇보다 ‘발동’이 걸려야 한다. 올겨울 색을 빨강으로 꼽은 패션 전문가의 전망이 시동을 걸어줬다. 머리에서 맴돌던 궁리가 손끝으로 내려오자 반짇고리를 꺼냈다. 그래도 은근히 꾀가 났다. 요즘 눈도 손가락도 짱짱하지 못해서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간단하면서 새롭게 코트의 감각을 바꾼담? 결론은 단추 바꾸기였다. 빨간 코트에는 금색, 회색에는 은색 금속 단추를 달았다. 입던 옷 같지 않고 고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차지하는 면적은 지극히 작은 단추 몇 개가 옷의 느낌을 확 바꾼 것이다. 옷을 사면 마무리가 시원찮아서 실밥이 너덜거릴 때가 많다. 단추는 더하다. 옷을 사자마자 덧바느질을 하지 않으면 어느새 단추가 사라지고 없기 일쑤다. 서둘러 외출복을 걸치는데 얼룩이 눈에 띄면 물티슈로 슬쩍 문지르고, 실밥이 터졌으면 접착테이프로라도 임시방편 삼을 수 있다. 단추는 아니다. 하나라도 없으면 아무리 바빠도 옷을 바꿔 입어야 한다.
고집불통 할머니
심지어 단추가 전쟁의 승패까지 가르기도 했다. 1812년 러시아의 혹한 속에 나폴레옹 군대의 장교들과 보병들은 주석 단추로 채우는 외투와 바지, 재킷을 입고 있었다. 광택을 띤 금속성의 주석은 기온이 떨어지면 푸석푸석한 비금속성 흰색 가루로 변하기 시작한다. 군복 단추가 떨어져 나가면서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로 진군하지 못한 채 패배하고 말았다. 혹한이 더 직접적인 패인일 수도 있다지만, 단추처럼 아주 사소한 것이 몰락의 도화선일 수도 있다는 교훈을 깨닫게 한다.
단추가 성장의 가늠자일 때도 있다. 아이가 스스로 단추를 채우는 날, 부모는 ‘이제 다 컸구나!’ 뿌듯해진다. 평생 절로 채워지는 듯 의식도 못 했던 단추가 어느 날 채우기 힘들어졌다면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옷의 품질도 대번 알아보게 한다. 단추가 튼튼하게 달려있으면 품질보증이다. 헝겊으로 잘 만든 아기곰도 단추 눈이 달리지 않으면 결코 귀여운 인형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단추는 ‘버튼’으로서 자신보다 엄청나게 큰 덩치나 시스템을 움직이고 멈추고, 소멸시키고 소생시키는 마스터키가 아닌가.
연말 분위기에 맞춰 금색 단추가 빛나는 빨간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서며 문득 헤아려 본다. 내게 바꿀만한 ‘단추’는 무엇인지. 한 살 더 먹어갈수록 큰 것은 커니와 작은 것조차 바꾸기가 쉽지 않은데, 내년엔 어떤 소소한 것이나마 바꿔 나를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해야 할지. 언뜻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각 좀 해봐?’ 약속 시간을 칼같이 지키려 들지 말고 5분여 늦어보는 거야. 그러면 늘 지각하는 누구에게도 ‘척’이 아니라 진심 너그러워질지도 몰라.
새해에는 ‘왜 그러지?’ 대신 ‘뭔가 사정이 있겠지’로 마음을 넓혀가고 싶어서다. 옳다, 맞다 여길 때 스스로 행하면 그뿐이건만, 가까운 이들에게 강요하진 않았는지? 혼자 단정하고 화를 내진 않았는지? 속 좁았던 나를 돌아보게 되는 연말이다. 내둥 처박아뒀던 코트의 단추를 바꾸듯, 아무리 작은 것도 바꾸는 데는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나에게나 남에게나 그때를 기다려줘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한해 두해 점점 고집불통 할머니로 바뀔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