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대신 연필·종이… 책상 위 '아날로그 바람'

직장인 안정하(26)씨 책상엔 은색 기차 모양의 '샤파' 연필깎이와 연필, 지우개가 항상 놓여 있다. 연필을 깎다 보면 옛날 생각이 난다는 그는 "특유의 사각거리는 맛이 그리워 요즘 연필을 다시 쓰고 있다"며 "뭉툭해진 연필을 깎을 때면 마치 집 안을 청소한 듯 마음이 시원해지고 가벼워진다"고 했다.

책상 위에도 복고 바람이 분다. 만년필, 연필과 다이어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손맛과 향수(鄕愁)를 앞세운 문구판 '아날로그의 반격'이다.

연말을 맞아 종이 다이어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스마트폰으로도 간편하게 일정 관리나 메모를 할 수 있지만, 손으로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길 때의 감촉까지 느끼긴 어렵기 때문이다. 소셜커머스 티몬에 따르면 최근 한 달 다이어리 판매량은 전월 대비 3배 증가했다. 작년과 비교해도 38% 늘어난 수치다. 책등 안쪽에 달린 6개 고리에 속지를 갈아 끼울 수 있는 '6공 다이어리'가 특히 인기다.

만년필과 연필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손이 많이 가지만 마니아들에게는 그것조차 매력이다. 캘리그래피(손 글씨) 열풍과도 관련 있다. 온라인 쇼핑몰 옥션이 10~11월 문구류 판매를 조사한 결과 만년필 판매량은 작년보다 19배 가까이 늘었다. 최근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 받은 박정훈(33)씨는 "클릭 몇 번이면 끝나는 스마트 기기와 달리 만년필은 자주 잉크를 채우고 펜촉도 닦아 줘야 하지만 이 과정 자체가 즐겁다"고 했다.

연필·연필깎이 판매량도 각각 37%, 29% 늘었다. 연필은 꾸준히 깎아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연필심을 날렵하게 다듬다 보면 생각이 가지런해지는 효과가 있다. 회사원 주세훈(34)씨는 "스트레스받을 때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으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손잡이를 돌려 깎는 연필깎이 대신 칼을, 이왕이면 커터칼보다 고급 나이프를 찾는 마니아도 있다.

한때 누구나 썼던 아날로그 문구류는 스마트 기기에 밀려 사라지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사실이 매력이 됐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아날로그 문구류는 희소성과 소장 가치가 높고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며 "각박한 세상에 지친 사람들이 문구에서까지 작은 위안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