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2.31 22:44

['산전수전 20년' 한국벤처… 창업 때부터 美시장 노린다]

토종 스타트업 40여 곳, 美서 새로운 역사에 도전

360도 각도로 영상 찍는 '포디' UFC 촬영 경기 130국에 생중계
VR음향으로 할리우드 두드리고 '스타트업 올림픽'서 1위 수상도

VR동영상·보안용암호기술 등 세계적 기술력 벤처 속속 등장
국내 성공 앱, 美서 바로 인기도
20년전 초기 벤처땐 경험 부족… 이젠 투자·해외진출 시스템 갖춰

지난달 27일(현지 시각) 오후 영상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포디리플레이 정홍수(43) 대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국도를 달렸다. 직원 5명과 나눠 탑승한 승합차 두 대에는 360도 각도에서 스포츠 영상을 찍기 위한 카메라 100대가 실려 있었다. 30일 오전 라스베이거스 티모바일아레나에서 열린 종합격투기 UFC 경기를 촬영하기 위한 장비였다.

지난달 27일 오전 경기 판교에 있는 특수 영상 제작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포디리플레이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카메라 촬영 장비 앞에서 뛰어오르고 있다.
한국서 통하면 글로벌에서도 통해요 - 지난달 27일 오전 경기 판교에 있는 특수 영상 제작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포디리플레이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카메라 촬영 장비 앞에서 뛰어오르고 있다. 2016년 미국 실리콘밸리로 진출한 포디리플레이는 미프로야구(MLB)협회, 미프로농구(NBA)협회 등과 기술 공급 계약 체결을 앞두고 있다. 포디리플레이처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는 토종 스타트업들이 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이 회사는 선수들의 모습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빙 둘러가며 보여주는 '타임슬라이스' 영상을 찍어 생중계로 전송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총알을 피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이들이 30일 촬영한 UFC 경기는 전 세계 130여 국에 생중계됐다. 정 대표는 "2016년 6월 미국 프로야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경기에서 첫선을 보인 후 영상 제작 의뢰가 이어지고 있다"며 "미국프로야구(MLB)협회, 프로농구(NBA), 일본프로야구(NPB)협회와 2~3년 장기계약을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 SDS 출신인 정씨는 2012년 경기도 성남 판교에 직원 5명의 특수영상 제작업체 포디리플레이를 설립한 데 이어 2016년 4월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현지 법인을 냈다. 해외 주문량이 늘면서 직원 수는 24명으로 늘어났다. 정 대표는 "미국 스포츠 시장은 한국보다 1000배나 크기 때문에 처음부터 미국을 겨냥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토종 스타트업들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좁은 국내 시장을 벗어나 글로벌 스타트업들의 각축장인 실리콘밸리에서 성공 신화를 만들어 가는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서울 송파구 버즈빌 본사에서 에티오피아 출신 개발자와 한국인 개발자가 함께 스마트폰 잠금화면 광고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 버즈빌 본사에서 에티오피아 출신 개발자와 한국인 개발자가 함께 스마트폰 잠금화면 광고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2016년 미국에 진출한 버즈빌은 현재 해외 30국에 서비스를 하고 있다. /버즈빌

지난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앞에서 현지 직원들과 함께 선 센드버드의 김동신(맨 왼쪽) 대표.
지난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앞에서 현지 직원들과 함께 선 센드버드의 김동신(맨 왼쪽) 대표. 2016년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모바일 채팅 업체 센드버드는 지난달 글로벌 벤처투자업체(VC)로부터 1600만달러(약 171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센드버드
국내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 지원기관인 K-ICT본투글로벌에 따르면 현재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서 활동 중인 서울·경기지역 국내 스타트업만 이미 4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서초구에 본사를 둔 모바일 채팅 앱(응용프로그램) 업체 센드버드는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로부터 1600만달러(약 170억원)를 유치했다.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 출신 본브레테크놀로지(착용형 의료기), 솔깃(모바일 게임), 경남창조경제혁신센터의 엠텍글로벌(초소형 초음파 진단기) 등 비(非)수도권 스타트업들도 약진하고 있다.

김종갑 K-ICT본투글로벌센터장은 "한국 벤처 역사가 20년을 넘어가면서 세계에서 통하는 기술력을 가진 스타트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20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될성부른 기업에 투자하고 해외 진출까지 지원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미국에서 승부수 띄우는 스타트업들

실리콘밸리로 간 스타트업들
서울 강남구에 있는 음향 기술 전문 기업 가우디오디오랩은 VR(가상현실) 전용 360도 음향 시스템으로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2017년 1월 LA다운타운 한가운데에 사무실을 열고 현지 마케터와 영업 인력까지 고용했다. LG전자에서 동영상 압축기술 표준을 담당하다 창업한 오현오(45) 대표는 "VR 콘텐츠 제작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영화·게임 제작사들이 밀집한 할리우드에 법인을 세웠다"고 했다. 처음엔 시행착오도 많았다. "유명 VR 영화감독들을 만나며 기대에 부풀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제작비 투자를 요청하더라고요. 아, 이게 할리우드구나 했죠." 그다음부터 방향을 틀어 미국 내 크고 작은 방송·게임 기자재 전시회를 모조리 다니며 기술을 알렸다. 이 회사 음향 기술은 VR 기기를 쓰고 고개를 돌리면 소리도 그에 맞춰 방향과 울림이 바뀌게 하는, VR 서비스의 핵심 기술이다. 오 대표는 "비밀협정 때문에 이름 공개를 못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메이저 영화 제작사 10여 군데와 기술 공급 협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안양의 투아이즈테크는 두 쌍의 어안(魚眼) 렌즈가 달린 초소형 VR 카메라로 오는 9일(현지 시각)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IT(정보기술) 전시회 CES 2018의 혁신상 수상자에 선정됐다. 삼성·LG전자 등 글로벌 기업들이 휩쓰는 혁신상을 직원 3명짜리 초미니 회사가 받게 된 것이다. 이 회사 송헌주 대표는 미국 델라웨어에 현지법인을 등록하고 시장 확대와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송 대표는 "VR 시장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이제 막 열리고 있기 때문에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고 했다.

보안용 암호 생성 기술을 갖고 있는 EYL은 최근 펜타곤(미국 국방성) 건물이 보이는 미국 알링턴 인근에 법인 사무실을 열었다. 경기도 성남의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부설 K챔프 사무실에서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 DC로 직행한 것이다. 이 회사는 가로세로 각각 1.4㎜ 크기의 초소형 칩에서 난수를 자동 발생시키는 기술을 갖고 있다. 각종 모바일 기기와 IoT(사물인터넷) 제품의 보안 장치에 쓰는 기술이다. 2016년에는 전 세계 스타트업 올림픽으로 통하는 보스턴 매스챌린지에서 1위를 하기도 했다. 백정현 상무는 "조만간 미국 표준국(NIST) 인증을 받을 예정"이라며 "그동안 보안 분야만큼은 해외에서 성공한 한국 기업이 거의 없었지만 한국 보안 기술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통하면 글로벌에서도 통한다"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 희망 국가·기업 수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에는 한국 IT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이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들이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를 갖춘 국내에서 다양한 서비스와 기술을 검증해본 뒤 해외로 진출하기도 한다. 반도체와 TV·모바일, 자동차 분야에서 한국 대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면서 한국 스타트업을 보는 해외 투자자들의 눈도 이전과는 180도 달라졌다.

직장인용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앱으로 유명한 팀블라인드는 2014년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진출한 이래 어느덧 미국 IT 기업 직원들이 즐겨 이용하는 앱으로 자리 잡았다. 마이크로소프트 4만명, 아마존 2만5000명, 구글 1만명, 페이스북 5500명, 애플 5000명 등 내로라하는 미국 IT 기업 직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최대 차량 공유업체 우버에서 잇따른 스캔들이 터졌을 때 블라인드 게시판이 터져 나갈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김성겸 이사는 "한국에서 잘되는 것을 보고 감(感)이 왔다"면서 "IT 기업이 많은 시애틀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선 회사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걸어가면 알아보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구글 마켓과 앱스토어 등 글로벌 서비스 플랫폼(기반)의 등장으로 IT 시장의 국경이 무너지고 해외 시장 판로 개척이 한결 쉬워진 것도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서울 송파구에 본사를 둔 스마트폰 잠금화면 광고 업체 버즈빌은 2012년 창립 이래 미국·대만·일본 등 30국에 서비스를 출시했다. 현재는 회사 직원 71명 가운데 14명이 외국인으로 에티오피아 개발자와 프랑스·베트남 디자이너 등 말 그대로 다국적 기업이다. 이관우(34) 대표는 "모바일 앱스토어의 발전은 문화와 언어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줬다"며 "전 세계 1700만명 이용자를 바탕으로 올해 800억 매출을 달성하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