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03 09:44

요즘은 어딜 가든 아르바이트생을 만나게 된다. 내 딸과 아들도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했던 터라 이들을 보면 한마디를 꼭 건네게 된다. “힘들지요?” 엄청 추웠던 며칠 전 즉석 떡볶이집에 갔을 때도 그랬다. 재료를 양껏 담아서 떡볶이를 해먹은 후 밥까지 볶아먹는 곳인데, 손님이 떠난 자리마다 치울 게 많아 보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 아르바이트생은 우리가 앉을 곳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힘들긴요. 여긴 그래도 따뜻한데요, 뭐.” 스물 갓 넘음 직한 청년은 테이블을 닦다 말고 고개를 들어 씨익 웃었다.

하기야 테이블마다 조리기구가 열을 뿜는 데다 일이 바빠선지 그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했다. 검은색 굵은 뿔테 안경이 콧잔등 아래로 흘러내렸어도 추켜올릴 새가 없는 듯했다. 추운 바깥에서 하는 일보다야 낫겠다 싶다. 요즘 같은 추위에 가장 힘든 아르바이트는 택배 상·하차라고 한다. 한 아르바이트 포털의 최근 조사에서 극한 알바 1위로 꼽혔다. 추위는 물론이거니와 엄청난 작업물량이 쉴 틈 없이 쏟아지기 때문이란다. 2위는 아찔한 높이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건물 외벽을 청소하는 일이었고, 행사도우미와 나레이터 모델, 손 세차, 배달 아르바이트가 뒤를 이었다.

조선일보DB

시급은 짜고 업무량은 많고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추위와 싸워야 하지만, 아르바이트생 대부분은 일을 계속한다. 용돈과 식비 등의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서다. 젊은이만 그런 건 아니다. 중년도, 노년까지도 추위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뛴다. 어느 추운 날 아침, 벨이 울려 현관문을 여니 머리가 허연 어르신이 택배 왔다며 봉투를 건넸다. 은행에서 보낸 체크카드였다. 그분은 수령자 신원을 꼼꼼하게 확인한 후, 뜻밖에도 노트패드를 익숙하게 다루면서 기록하고 사인까지 받아갔다. 지하철 안에서는 이런 ‘실버 퀵’ 노년을 심심찮게 본다.

단 하나의 마침표

추운 날 밖에서 일하는 이들을 생각하노라면 따뜻한 집 안에 있는 것만도 때로 송구하고, 또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비바람과 눈보라가 치는 궂은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몸이 받쳐줘서 열심히 일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나 또한 출산하는 날조차 출근하며 30여 년을 일하고, 이제는 아들의 출근을 배웅하면서 감사를 되새김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언제 일어날지 모른 채 병석에만 누워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건강하고, 따뜻한 잠자리와 끼니만 걱정 없어도 진정 감사한 일이다.

아니,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음만으로도 감사, 감격할 이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을까. 오늘은 어제 세상을 뜬 사람이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마침표로 찍고 싶은 단 하나의 단어를 내게 묻는다면 당연히 “감사”라 답하고 싶다. 한 해 동안 특별히 좋은 일이 있지는 않았다. 특별히 나쁜 일도 없었다. 어쩌면 평온하게 흘러간 한 해였던 것 같다. 나이 들어 얻는 장점이라면 일상의 평온함에 대해 감사를 더 해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랄까. 평온함이란 내게 곧 지루함이자 권태로움과 동의어였는데 말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려놓고, 조금 더 그냥 감사해질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감사하기만 하다. 초등생 시절 친구들과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다. “리리리자로 끝나는 말은 괴나리 보따리 댑싸리 소쿠리 유리 항아리….” 이렇게 ‘리’자로 끝나는 말이 아니라 ‘그’자로 시작되는 말이 연이어지는 ‘감사송’을 얼마 전 유튜브에서 처음 들었다. 갖가지 ‘그’자가 감사와 엮어져서 더욱더 감사한 마음이 들게 했다. “그래서 감사, 그래도 감사, 그러나 감사, 그러므로 감사, 그렇지만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러니까 감사, 아주 그냥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이 가운데 ‘그냥 감사’가 나는 가장 좋다. 지난가을 거제를 여행했을 때 크게 쓰여 있는 걸 봐서일까. ‘바람의 언덕’을 올라가는 분홍 꽃길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다가 밑을 내려다보니, 저 멀리 노란 지붕에 빨간색 ‘그냥 감사해요!’ 글자가 눈에 뜨였다. 순간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빨강과 노랑의 대비만큼이나 선명해졌다. 인생에서 남는 것은 두 가지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쁘게 감사하게 살았는가, 찡그리며 원망하며 살았는가. 어려움에 부닥칠지라도 결국 감사가 남는 인생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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