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03 03:10

서울시, 319곳 불시점검

소방법규 위반 업소 무더기 적발
53곳, 불 나도 비상구로 탈출 불가… 스프링클러 안되는 곳도 태반
대형 쇼핑몰 비상구도 상황 비슷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때 생사(生死)를 가른 것은 비상구였다. 3층 남성 사우나에 있던 사람들은 이발사의 안내로 비상구를 통해 탈출했다. 하지만 2층 여성 사우나에 있던 사람들은 비상구를 찾지 못해 출입문으로 몰려나왔다가 유독가스를 마시고 숨졌다. 비상구가 사우나 구석 창고 끝에 있고, 잡동사니를 놓은 선반에 가려져 있었다. 비상구가 제 기능을 못한 것이다. 사망자 29명 중 20명이 2층에서 발견됐다.

이런 '유령 비상구'는 제천 참사 이후에도 그대로다. 본지가 서울시내 사우나와 대형 쇼핑몰 등을 둘러본 결과 비상구 앞에 짐과 쓰레기를 쌓아 둔 곳이 많았다. 비슷한 기간 서울시 소방재난본부도 서울시내 총 319곳의 사우나·찜질방을 불시 점검했다. 그 결과 장애물 등으로 비상구 대피가 불가능한 경우가 53곳이었다. 이를 포함해 스프링클러 미작동 등 점검 대상의 38%인 120곳이 소방법규를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약간의 편의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안전에 눈감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막혀 있는 비상구

서울시 용산구에 있는 'A스파'는 지상 6층짜리 건물로 대지 면적만 1만3200㎡(약 4000평)에 달한다. 1층에는 마사지실과 식당, 2~3층은 여성 사우나, 4층은 헬스클럽, 5~6층은 남성 사우나가 들어서 있다. 3층 여성 사우나는 동시 이용객이 평일 50~60명, 주말에는 200여명에 달한다. 비상구는 탈의실 구석 창고에 붙어 있었다. 비상구 주변엔 사우나 수건과 매점 상품, 청소 도구와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제천 스포츠센터 여성 사우나 비상구와 똑같은 상태였다. 일부 비상구는 안팎에서 열 수 없도록 잠겨 있는 구조였다. 안에서 손잡이를 돌렸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밖에서도 열 수 없었다. A스파 직원은 "비상구 옆 창고에 매점 상품 등을 보관해야 한다. 절도를 방지하기 위해 평소에 문을 잠가놓고 있다. 안에서 열쇠로 열면 열린다"고 했다. 이 사우나는 닷새 전 서울시 점검에서 적발됐지만, 여전히 시정되지 않았다. 사우나 직원은 "불시 점검 이후 소화전 앞에 있던 물건들을 깨끗이 치웠다. 비상구 쪽도 최대한 치운 것"이라고 했다.

서울 중구에 있는 5층짜리 건물 'B사우나'는 비상 통로가 문제였다. B사우나 직원은 "비상구는 확실히 열려 있다. 불이 나도 대피할 수 있다"고 했다. 비상구로 나가보니 비상 통로 1층 출구가 주황색 수건과 때수건을 쌓아놓은 바구니들로 절반 정도 막혀 있었다. 건물 외부에서 화재가 발생해 불씨가 수건 더미로 옮아 붙는다면 비상 통로를 이용한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이용객 이모(72)씨는 "만약 불이 난다면 사우나는 불가마가 될 것이다. 빨리 수건 등을 치우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우나 건물 2층 한쪽 벽에는 '방수용 기구함'이 설치돼 있었으나 수건 수거함이 절반 이상 가로막고 있었다. 각 층에 설치된 소화기 중 제조 연도가 2014년으로 사용 연한 1년을 훌쩍 넘긴 것들이 있었다.

대형 쇼핑몰 비상구도 제 기능 못해

비상구가 '생명선'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사우나·찜질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용객이 수천 명에 이르는 일부 대형 쇼핑몰에서도 비상구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15층 규모의 대형 쇼핑몰은 일반 매장 외에도 병원, 영화관, 헬스클럽, 푸드코트가 입점해 있다. 주말엔 수천 명이 이용한다. 의류 매장이 입점해 있는 이 건물 2~5층 비상구 앞에는 의류 박스와 이동식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널려 있다. 평소에도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비상구 문에는 '매대, 적치물 적재 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박스와 옷들로 인해 비상구 앞 통로는 성인 한 명씩 겨우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화재 발생 시 불이 옷가지에 옮아 붙을 경우 비상구는 완전히 막혀버리는 셈이다. 비상구 인근 매장 직원은 "창고 공간이 부족하다 보니 비상구 인근에 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건물 소방 장비는 이미 연식이 오래 지난 것이다. 9~10층 사이에 설치된 소화기는 제조년이 2006년, 마지막 점검은 2010년이었다.

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비상구를 막아놓는 등 소방법령 위반 때 엄정한 법 집행으로 안전 관리에 허점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현실에선 안전 의식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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