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08 10:00

아침에 나선 출근길, 겨울이 깊디깊어져서일까, 문득,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이 제법 싸늘하다. 갑작스러운 온도 차이 때문이리라. 나도 모르게 가로수 밑에 서서 눈을 껌벅이다가 꾹꾹 눌러 닦는 눈물이다. 눈을 크게 떴다 깊게 감고 닦았다. 두세 차례 닦다 본 길거리가 환하게 보인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세상. 하, 몇 번을 감았다떠야 잘 보이는 세상. 허허, 또 시간이 흘렀구나. 하필 이때 만져보는 얼굴 주름이라니, 덕지덕지 묻은 나이가 잡히다니. 하, 좀 더 세게 눈 감아 고개를 흔들다가 뜬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하늘을 본다. 가로수 끝에 묻어가는 하얀 느낌 사이로 구름이 제시간을 세고 있는 듯. 그래, 또 처음 보는 모양의 구름이다. 그러니 저 구름이 가지고 다니는 시간이란 처음만 있다는 생각에 괜히 입을 삐쭉여 본다. ‘후후, 야, 구름아 너만 새 시간인 줄 아냐? 내 옷깃에, 내 눈물에, 흐르는 시간도 새것이다!’ 중얼거리듯 퉁명하게 말하고 나니, 몸 한쪽이 시원해졌다. 가슴 쭉, 고개 턱, 몸에 힘주어 버텨도 본다.

다시 가쁜 발걸음을 내디디며 우쭐한 기분에 보는 거리는? 어? 그런데, 그대로다. 여전히 오가는 사람이며 차들이라니. 나도 그중 하나라니. 그러니까, 나만 혼자 괜히 ‘세상은 멋지다’라며 웃어본 것이라니! 꽤 많은 겨울이 오고 갈 때마다, 아니 그 어느 지점에서든, 이런저런 시간마다 ‘아, 내 시간은 멋지다!’라고 웃던 기억과 그 데자뷔들이 ‘저요 저요’ 하며 손 흔드는 것이라니!

몇 걸음 더 걷지 못하고, 서 있는지 가는지 모르는 구름처럼, 몸을 흔들거려 본다. 계속 다가서다 획획 지나가는 사람들. 그 사람마다 휘적거리는 시간을 본다. 그들 시간이란 얼굴에 있다가, 손에 있다가, 발소리 따라 돌아다니는 듯도 했다. 그랬다. 움직일 때마다 튕겨 나오는 것들. 그것이 시간이든, 또 그것을 보는 내가 시간이든, 이때는 같아지는 법. 뭐가 재미있는지, 짤막한 즐거움이 발등으로 톡톡 떨어졌다.
 
참 우연이었다. 아, 맞아.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하면 어떨까? 발걸음을 더 천천히 내디디며 중얼거려 본다. 하나, 둘, 세엣, 네~엣, 다~아서~엇.... 세는 숫자들이 간신히 흔들리고 있는 나뭇잎 위에 젊잖게 앉는다. 그 곁에 잠깐 바람도 졸고 있고. 고만고만하게 모여 있는 모습이 누굴 닮은 것 같아 깜짝 몸을 움츠린다. 다시 세게 감았다 뜨는 눈! 아니, 눈가에 접었다 펴지는 내 시간이었을까? 

혹시, 이러면 시간이 천천히 다가올까? 내가 가는 길마다 시간이 오다가 쉬는 곳을 만들어 놓으면? 그러니까, 그곳마다 내 지나온 멋진 시간을 펼쳐 놓는 거야. 어차피 생겨났고, 멋진 시간 매듭이 지어졌으니, 그 매듭에서 실컷 놀다 오라는 거지. 그리고 그 서로 노는 시간을 신나게 보는 거야. 아마, 이때는 내가 태어나던 때와 저 먼 곳에 있는 때 등등의 시간이란 같은 무게를 가지라며 말이지.

갑자기,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 발걸음이 힘차다. 신호등이 바뀐 것. 나도 모르게, 다시 눈을 세게 감았다 더 세게 뜨고 길을 건넌다. 다시 바뀐 세상이다. 순간순간, 내 세상이란 나도 모르게 지나쳐 버린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스치는 실웃음이 하얗다. 아니 투명했다. 모든 순간마다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만이 유효했다. 아니 사라지고 태어나는 것만이 더 유효했다.

그랬다. 새로운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하는 방법은 결국 내가 천천히 움직이는 세상을 지켜보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은 내 구름보다 더 천천히 이 거리를 걸어가며 말이다. 특히, 오늘처럼, 길바닥 찬바람이 눈가를 스치고, 눈을 껌뻑이다 슬쩍 눈물을 훔칠 때는 더욱. 그럴까? 새로움이란, 새 시간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걸까? 하필이면 지금 출근길 내 몸에서 나오는 슬쩍 눈물 빼고는. 이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나 혹은 내 구름 빼고는.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