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극장 마지막 관객 "추억이 사라지네요"

서울 봉천동에 사는 주부 김혜련(71)씨는 친구 10여 명과 7일 중구 정동 세실극장을 찾았다. 오후 3시부터 시작하는, 이 극장의 마지막 연극 '안네 프랑크'를 보기 위해서다. "남편이랑 데이트할 때 종종 왔었어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대한문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곤 했죠. 오늘 공연이 끝나면 폐관한다네요. 그 이유가 경영난이라니, 몇십 년 만에 찾아왔다는 게 너무 미안합니다." 김씨 일행은 세실극장이라고 적혀 있는 흰색 간판 밑에 나란히 섰다. 사진 십수 장을 찍은 뒤에야 극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42년간 정동을 지켜온 세실극장이 문을 닫는다. 대학로 연극거리가 탄생하기 전 대한민국 연극인들의 성지로 여겨지며 김혜자와 고두심, 김갑수, 손숙, 박정자 같은 스타 배우들을 길러낸 곳이다. 2013년부터 이곳을 운영해온 김민섭 세실극장 대표는 소유주인 대한성공회교회와 1300만원의 월세를 두고 협상을 했지만, 합의하지 못했다. 김 대표는 "대학로 극장의 두 배 수준인 월세를 채우려면 쉬지 않고 365일 극장을 돌려도 하루 40만원어치 표를 팔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도 임차료만 겨우 벌 수 있을 뿐이다. 김 대표는 "배우들 임금과 관리비, 1년에 1000만원 이상 드는 수리비 같은 건 자비로 해결해 왔다"고 말했다.

적자가 쌓이면서 공사비가 많이 드는 곳은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 오는 날 세실극장 천장에선 물이 샌다. 김 대표도 여러 궁리를 해 왔다. 한때 오전엔 어린이 연극, 저녁엔 일반 연극을 무대에 올려 두 배로 대관료를 받았다. 하지만 관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했다. 극장 바로 옆에서 민주화 운동 당시 기자회견 단골 장소였던 세실 레스토랑은 2009년 1월 문을 닫았다.

극장이 잘된 적도 있었다. 1976년 개관 당시엔 소극장 중에 규모가 가장 큰 데다 관영이 아니라 극단이 자유롭게 무대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극단들은 서로 극장을 빌리겠다고 다퉜고, 관객들은 표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섰다. 2000년 극단 '로뎀'이 운영을 맡을 당시 스타 배우들을 작품 주인공으로 올려 연극과 TV에 동시 출연하는 배우들이 생겼다. 2005년 뮤지컬 '점프(JUMP)'와 '난타' 공연을 할 때는 매진 행렬에 단체 관객들을 버스로 날랐다.

TV 보급과 영화 산업의 부흥으로 공연 업계가 점차 힘을 잃자 전성기도 저물었다.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학생 관객이 뚝 끊겼다. 김 대표는 "당시 반년이 넘게 낮에는 극장을 운영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아쉬운 건 관객뿐만이 아니다. 연극배우라면 1970~80년대 세실극장 무대에 서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원로 배우 박웅은 "무대가 없던 시절 세실극장은 연극인들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며 "연극인들의 혼과 정신이 사그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 손숙은 "'홍당무', '바다의 침묵', '심청'이라는 작품을 세실에서 했던 기억이 난다"며 "한때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고 연극인에겐 중요한 장소"라고 떠올렸다.

극장 소유주인 대한성공회교회는 극장을 헐고 사무실을 만들 예정이다. 교회 측은 "1~2년 정도는 서울시나 예술 협회 같은 단체에서 지원을 받아 극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지원이 수십 년 계속된다는 보장이 없다"며 "세실극장이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한 마음은 잘 알지만 경영난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폐관) 결정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