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당국 '보이지 않는 손' 움직였나

8일 오전 9시 서울 외환시장이 열리자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27분엔 달러당 1058.8원까지 추락했다. 장중 환율이 1050원대로 떨어진 것은 2014년 10월 31일(1052.9원) 이후 3년 2개월여 만이다. 하지만 환율은 곧바로 반등하며 10여 분 뒤엔 4.8원 오른 1067.5원에 거래됐다. 불과 10여 분 만에 롤러코스터 장세를 연출한 것. 이날 환율은 전날보다 3.3원 오른 1066원에 마감했다.

시장에선 외환 당국이 직접 개입한 것 아니냐는 추정이 나왔다. 한국은행은 원화를 내다 팔고 달러화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환율을 높이고 원화 가치를 낮출 수 있다. 다만 외환 당국은 시장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는다. 시장 개입 패턴이 노출되면 해외 투기 세력 등에 악용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환율, 장중 3년 2개월 만의 최저

새해 들어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떨어지는 원화 강세는 가속화하고 있다. 작년 말 1070.5원으로 마감했던 환율이 올해 첫 거래일인 지난 2일 1061.2원으로 3년 2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이후 외환 당국 수장인 김동연 부총리와 이주열 한은 총재가 잇따라 구두(口頭) 개입에 나섰지만 지난 5일에는 장중 한때 1060.2원까지 내려갔다. 주말을 넘긴 8일에는 장중 최저 환율이 1058.8원으로 다시 떨어졌다.

최근 원화 강세는 북한 관련 리스크 완화와 달러화 약세의 영향인 것으로 분석된다. 환율이 상반기 중에 1000원까지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될 우려 때문에 우리 외환 당국이 사실상 손발이 묶여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바닥에 깔렸다.

◇차·반도체 등 수출업체 새해 초비상

환율 하락이 이어지자 수출 업체들은 초비상이다. 환율이 떨어지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수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장기적으로 거래 통화를 다변화해 원·달러 환율 움직임에 따른 외환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 이외에 환율 급변동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도 딱히 없는 상황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현지 통화 거래 확대로 환 손실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고 말했다. 환율 하락은 글로벌 경쟁력 하락으로 부진을 거듭하는 국내 완성차 업체에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된다. 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완성차 업체 환율 마지노선은 '1달러=1050원'. 이 아래로 떨어지면 차를 만들어 미국에 수출해도 손해가 난다는 의미다.

기아차의 경우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이 10% 하락하면 연간 3500억원 이익이 감소한다. 현대차 관계자는 “최근엔 원화 가치가 엔화보다 더 급격히 올라가면서 글로벌 자동차 판매 시장에서 경쟁하는 일본 업체에 비해 불리한 상황”이라며 “도요타, 혼다 등은 엔저로 인한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체도 환율 하락에 따른 손실이 예상된다. 삼성전자 경우 환율이 10% 떨어지면 영업이익이 2~3% 감소하는 것으로 업계는 추정한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환 관리위원회에서 면밀히 모니터링하지만 수출 비중이 95%에 달해 환율이 떨어지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유업계도 환율이 급격히 하락하면 수출 부진과 원유 매입, 제품 판매 사이 시차 때문에 발생하는 환차손도 감수해야 한다. 정유 업계 관계자는 “최근엔 유가마저 올라 이중고에 놓였다”고 말했다.

◇“금리·유가 인상에 환율 하락 겹치며 중소기업에 치명타

특히 해외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에 의존하는 중소기업은 환율 하락으로 더 큰 타격이 우려된다. 중소기업 단체 관계자는 “최근 최저임금 문제와 같은 노동 이슈에 가려 있지만, 환율 하락은 과거와 달리 금리 및 유가 인상과 맞물리면서 중소기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무역연구원이 지난달 50만달러 이상 수출하는 기업 514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해 사업계획상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평균 1090원. 조사 대상기업 68%인 360개사가 올해 사업계획을 짤 때 환율을 1075~1175원으로 책정했다.

하지만 환율은 이미 전망 범위를 벗어나면서, 상당수 기업이 환차손을 입은 상황이다. 특히 국제무역연구원 조사에서 기업 절반은 환율 변동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환율 하락은 고스란히 수익 악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WTO 규정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출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과 환율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시그널(신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