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 자고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한마디로 북새통이다. 어젯밤에는 보지 못한 고등학생들로 빈자리가 없다. 분명 그곳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어디를 봐도 좌석에 우리 팻말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과학고 아이들을 위한 팻말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다. 아마도 미국 대학 투어를 온 학생들인 모양이다. 한참을 헤매는데 누군가 옆 식당에 자리가 배정됐으니 그리 가란다. 학생들에 밀려 옆 허름한 작은 식당으로 옮기면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과연 저 애들이 투자한 경비만큼 꿈이나 희망을 키우고 돌아갈까 싶다.
한때 나도 유학이란 어설픈 꿈이 있었다. 내 아버지는 늘 우리 남매들에게 공부만 잘하라고, 잘하면 대학이고 유학이고 다 보내 준다고 하셨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꺼내 항의했더니 공부 잘하라고 한 소리라며 유학은 못 보내주신단다. 그때는 능력도 안 되면서 그 소리가 참 서운 했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 여자를 대학까지 공부시킨다는 게 그리 쉬운 세월은 아니었다. 사회 분위기도 그랬고 집안 형편 또한 그랬다. 지금 돌이켜보면 배운 건 없어도 부모님이 참 깨어있는 분이셨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170년을 자랑하는 퀸시마켓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퀸시마켓으로 갔다. 이곳은 보스턴 최고 관광지다. 볼거리와 먹을거리 탓에 사람들로 항상 북적인다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발걸음 빨리 지나가는 직장인들뿐이다. 그나마 여기가 퀸시마켓이라고 즐비한 가게들이다. 군데군데 이제 막 가게들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가 너무 빨리 온 탓에 그냥 썰렁하다.
듣자니 보스턴은 옛날 항구도시였단다. 그때 항구에 즐비하던 창고들이 항구가 폐쇄되고 나서 가게들로 하나둘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엔 20여 개의 레스토랑과 100여 개의 상점이 즐비하다는데, 구경도 못 하고 찰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하버드 대학 구경을 하러 차에 올랐다.
152년 전통의 MIT 공과대학
유유히 흐르는 찰스강을 건너자마자 MIT 공과대학이다. 전 세계 한다 하는 이공계 수재들이 모여드는 학교다. 한 동네가 온통 대학이다. 교수나 졸업생 중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라니 그 명성을 알만하다. 80여 채의 학교 건물이 여기저기 서 있으니 어디까지가 대학이고 아닌지 구별조차 못 하겠다. 과별로 건물들이 분리되어 있어 너무 거대한 탓에 그냥 차를 타고 둘러보았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스타타센터다.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으로 1996년 타임지가 선정한 최고의 디자인상을 받은 건물이다. 주홍빛이 섞인 분홍색과 연회색, 진회색의 건물들이 등을 비틀고 기울어진 모습들로 서 있다. 다양한 곡선들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진 센터엔 세 개의 학부가 모여 있다고 한다. 이색적인 모양만큼이나 지어진 재료도 다양하다. 벽돌, 돌 스테인리스, 스틸 등 각종 재료로 지어졌다고 한다.
가이드 말로는 이 학교는 학생들이 원하는 공부를 시키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만약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말을 배우고 싶은 학생이 3명 이상만 되면 학과를 설치해 준다고 한다. 교수를 모셔오고 공부할 수 있는 제반 시설은 학교가 다 알아서 제공한다고 하니 정말 명성만큼이나 시스템이 부럽다.
며칠 전 구청에 휴대폰으로 찍는 전문사진 공부 반을 설치해 달라고 했다가 퇴짜 맞은 기억 때문에 더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그런 일에 언제나 들고나오는 핑계가 ‘여건상’이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러면서 왜 건의는 하라는지 이해가 안 된다. 왜 건의가 들어오면 해 볼 생각도 안는지.... 왜 무조건 ‘여건상’만 노래 부르는지.... 갑자기 씁쓸해진다.
370년 전통의 하버드 대학
씁쓸한 마음을 안은 채 하버드 대학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제일 좋다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만 가면 출세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니 왜 아니 그러겠는가. 차에서 내리는 그곳이 대학이란다.
그냥 도시 전체가 대학인 셈인데 어쩐지 유럽 냄새가 물씬 풍긴다. 낡은 집들과 벽돌 크기의 돌이 깔린 좁은 길이 차분하고 고요한데 대학생들의 젊음과 활기가 겹쳐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일행들이 단풍이 들기 시작한 교정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단체사진을 2번 찍었다. 첫 번째는 하버드 입학 사진이고, 두 번째는 하버드 졸업 사진이라며 모두 활짝 웃는다.
천천히 하버드대학 교정을 거닐어 본다. 비록 공부를 못해서 와서 공부하진 못했지만, 교정을 걸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넘친다. 푸른 잔디밭 위에 군데군데 빨강, 파랑, 노란색과 연두색 철제 의자가 놓여 있다. 달려가서 앉아 하늘을 올려 본다. 단풍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고개를 돌리니 바라다보이는 곳마다 붉은 강의실들이 하얀 창문과 함께 눈에 들어온다. 높아야 3, 4층이다. 그 앞쪽으로 학생인지 우리처럼 방문객인지 모를 사람 몇몇이 잔디밭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사색 중이다.
붉은 건물 사이로 회색 건물이 검은 조각상과 함께 눈에 들어온다. 이 학교 설립자라는 존 하버드다. 이 조각상의 발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말이 있단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오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단다. 물론 너도나도 존 하버드의 발을 만진다.
한데 이 대학이 세계 최고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생각이란다. 서열 매기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고 대학이라고 명명했다는데 좀 씁쓸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손자가 이 대학에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닿자 그런 내가 웃긴다. 역시 속물이다. 누가 누굴 탓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