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날에 덩달아 마음도 썰렁해진다싶을 때면 떠오르는 문구가 있다. 고사성어나 명언이 아니다. 오래전 어느 베이커리 윈도우에서 보았던 판촉용 네 단어 ― ‘늑대 목도리, 여우 장갑’. 눈 내리는 날, 남자가 팔을 여자의 어깨에 두르고,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은 그림이 곁들여져 있었다. 왜 하필 늑대지? 순간 떠오르는 엉큼한 늑대의 이미지가 목도리의 따스함과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내 기억에 콕 박혔다. 늑대가 악당으로 나온 숱한 동화를 읽고 자란 탓일까. 엉큼한 남자, 나쁜 남자의 대명사는 의당 늑대려니 했다.
하지만, 나는 늑대를 엄청 오해하고 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도 늑대처럼만 산다면 얼마나 멋진 삶이 될 수 있을쏜가! 언젠가 교육방송의 지식채널 프로그램을 보고 늑대에 대한 나의 무지와 편견부터 반성하게 됐다. 한때 인간과 더불어 가장 번성했던 포유류인 늑대는 우두머리가 10여 마리 이상을 이끌며 무리 지어 산다고 한다. 짝을 맺은 암컷과 수컷은 평생을 함께하고, 암컷이 죽으면 수컷 홀로 어린 새끼를 돌보다가 새끼가 성장하면 암컷이 죽었던 곳에 가서 굶어 죽는다고 한다.
21세기 완벽한 늑대로 살아가기
무리 안에서 싸움이 벌어질 때 우두머리는 힘센 쪽에 폭력이 아닌 장난을 걸어 공격을 잊게 만든다. 먹잇감을 구하기 힘든 겨울에는 혼자 나선다. 사냥감의 흔적을 발견하면 울부짖어 무리를 부르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무리에 대한 슬픔과 걱정의 울음을 선창한다. 뒤이어 무리는 격려를 담은 울음을 합창한다. 무리의 신뢰를 잃으면 모두의 동의를 얻은 늑대가 새 우두머리가 된다. 싸움에 능하고 난폭한 늑대는 될 수 없다. 무리 이탈을 일으켜 공동체가 약화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생존이 우두머리 선택의 기준인 셈이다.
이런 늑대를 어찌 나쁜 이미지로만 덮어씌울 수 있을까. 오히려 “늑대처럼만이라도 살아봐라” 해야지 않을까. 그렇게 강권하는 손바닥만 한 책을 지인에게서 받아 가방에 넣고 다닌다. ‘21세기에 완벽한 늑대로 살아가기’다. 1백 쪽이 채 안 되는 문고판이라 지하철에서 읽기에 그만이다. 출간된 지 얼추 10년은 되어 보이지만, 20대인 아들에게도 읽게 했을 만큼 늑대 같은 삶에 매료된다. ‘완벽한 늑대는 외로워하지 않는다’는 제1장 제목부터가 끌렸다. 사회관계망은 날로 첨단화되고 있어도 외로움은 되레 커져만 가는 요즘이 아닌가.
한 마리 늑대만 살아남는 시대가 온다, 허접한 인간들을 만나지 마라,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워라, 사람이 그리우면 책을 읽어라, 나만의 방식으로 행복하라…. 소제목들이 펼치는 내용에서는 더할 나위 없고, 각 장의 다음 제목들만 훑어도 완벽한 늑대로 사는 방법이 보인다. 자신을 믿는다, 현재를 살아간다, 함부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더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 좌절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이처럼 완벽한 늑대가 되면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했다”고 매 순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책의 결론이다.
늑대의 유아화한 형태
올해는 개의 해, 육십갑자로 따졌을 때 누런 개의 해다. 누런색이 금색과 닮아 복을 기원하고자 ‘황금 개’의 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실은 ‘황금늑대’의 해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 보도는 러시아 북쪽의 한 유적에서 발견된 개 화석 가운데 상당수가 늑대라는 연구가 나왔다고 전한다. 남부의 철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개 화석은 전부 개가 아니라고도 한다. 현대 개와 고대 늑대의 DNA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이미 화석을 비교 분석한 결과 밝혀졌다. 과학계는 늑대가 생존을 위해 사람에게 길들어 개로 진화했다고 보고 있다.
어떻게 변화했나 이것저것 찾아봤더니 유전자부터가 달라졌다. 고기만 먹던 야생 늑대가 사람이 주는 아무 음식이나 소화할 수 있는 가축의 유전자로 바뀌었다. 유전적 변화를 경험하면서 다 자란 개들이 어린 늑대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늑대의 유아화한 형태가 개”라는 학자도 있다. 무리 지어 살지 않고, 주인 등 특정한 상대에게 애착을 보이며 의존한다. 반가우면 핥는다. 이 또한 늑대 새끼들이 사냥터에서 돌아온 어미의 구토를 유발해 아직 소화 안 된 고기를 얻으려고 얼굴과 주둥이를 핥던 행동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보살핌으로 발달 속도가 느려져서 갓 태어난 강아지는 늑대 새끼보다 2배 정도 시일이 지나야 눈을 뜬다. 먹이도 스스로 찾아 먹는 대신 사람에게 낑낑거리며 요구한다. 게다가 꼬리를 항상 밑으로 늘어뜨리고 있는 늑대와 달리 개는 꼬리를 흔들거나 위로 향하며 감정표현도 하게 됐다. 무엇보다 개는 늑대의 달리기와 먹잇감 추적, 포획, 공격 능력을 호모사피엔스의 사냥과 싸움 기술에 보탰다. 그 덕분이라고 하기는 과분할까? 마침내 호모사피엔스는 그들보다 신체적 조건이 우월했던 네안데르탈인을 제치고 현생 인류가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렇듯 인간에게 공로가 큰 개이건만, 어째서 주로 욕 앞에 동원되고 있는지 참 이상하다. 그것도 저마다 귀한 ‘자식’과 ‘새끼’ 앞에다 사용해서 말이다. 더러는 ‘털’을 붙여 힘없고 돈 없는 처지에까지 빗대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적어도 황금 개의 해인 올해에는 욕이나 한탄의 ‘개’가 내 입에 혼잣말로라도 얼씬 말았으면 한다. 대신 그 조상인 늑대를 상기하고, ‘완벽한 늑대로 살아가기’에 다가가자고 작정해 본다. 비록 마음먹은 만큼은 아닐지라도 지난해보다는 조금이나마 멋진 한 해가 될 수 있잖을까. 황금의 해가 될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