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과 대법관 13명, 엇갈리는 기류

김명수 대법원장이 24일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사실상 3차 조사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의혹에 대해 대법원은 작년 4월 1차 조사를 했고, 김 대법원장 취임 후 최근까지 2차 조사를 했다. 김 대법원장 지시로 구성됐던 법원 추가조사위는 지난 22일 재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사들의 동향 등을 수집한 문건을 여럿 공개했다. 하지만 핵심 의혹인 '판사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사법행정이라는 이름으로 법관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성향에 따라 분류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며 "합당한 후속 조치를 위해 필요한 범위에서 조사 결과를 보완하고 공정한 관점에서 조치 방향을 논의해 제시할 수 있는 기구를 조속히 구성하겠다"고 했다. 대법원은 "기구 형태와 목적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김 대법원장은 이날 퇴근길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추가 조사 문제에 대해 "관련 기구와 긴밀히 의논하겠다"고 했다. 법원 내 기구를 만들어 재조사 과정에서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선 사실상 3차 조사를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김 대법원장은 추가조사위가 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를 동의 없이 강제로 열어보는 등 조사 과정에서 빚어진 위법 논란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법원 내부에선 "김 대법원장이 추가조사위 입장을 전적으로 수용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 대법원장은 그동안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를 주도해온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 출신이다.

김 대법원장의 이날 발표 내용은 전날 대법관 13명이 재조사 결과에 대해 낸 입장과도 방향이 많이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추가조사위는 2015년 초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 선고를 전후해 행정처가 청와대와 재판과 관련한 의견을 교환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공개했다. 이후 일부 언론이 '청와대가 영향력을 행사해 대법원이 원 전 원장에게 유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파기한 것 아니냐'는 취지의 보도를 했다. 이에 김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들은 23일 성명을 내고 "대법관들은 재판에 관해 사법부 내외부 누구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고 했다.

일부 언론의 의혹 제기에 반박하는 모양새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의혹 제기가 가능하도록 조사 결론을 낸 추가조사위에 대한 반박 성격도 있었다. 그런데 김 대법원장은 이날 "재판이 재판 외의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오해받을 만한 일은 어떤 경우에도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대법관들이 '재판에 어떤 외압도 없었다'고 밝혔지만 대법원장은 '그런 오해를 받은 것 자체가 잘못'이란 입장을 낸 것이다. 재조사 결과 발표를 두고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대립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일부 대법관들은 사석에서 "김 대법원장이 법원 혼란을 어떻게 수습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는 우려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조사 발표 후 일선 판사들 사이의 갈등도 전보다 더 깊어지고 있다.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는 24일에만 재조사 결과와 관련한 글들이 10개 넘게 올라왔다. 김동현 대구지법 안동지원 판사는 글을 통해 "드러난 부정에 대해서는 책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징계는 물론 형사처벌이 되는 부분은 대법원이 직접 고발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강제 수사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반면 김태규 울산지법 부장판사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한 이들로 구성된 추가조사위가 행정처 컴퓨터 강제 개봉 과정에서 제기된 법·절차 위반 지적을 정면 돌파해 이뤄낸 조사 결과가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것이었다"며 "추가조사위를 조사할 역(逆)조사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