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인 소공동'은 죽지 않는다, 다만 옮겨갈 뿐

22일 낮 서울 중구 소공로. 조선호텔에서 한국은행으로 가는 도로변 상가는 불이 꺼져 낮인데도 어두웠다. 건물 입구엔 커다란 자물쇠가 걸리고, 굳게 닫힌 셔터엔 그라피티가 가득했다. 1층에 줄줄이 있던 맞춤 양복점들도 간판만 걸린 채 비어 있었다. '명장의 집' 광고 문구가 그대로인 양복점 유리창엔 '무단 출입시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써 붙인 경고문이 보였다. 이 상가 건물에는 호텔을 신축하는 계획안이 현재 심의 중이다. 상가 건물은 일부 철거하고 일부는 외형을 보존할 계획이다.

서울 소공동 일대는 우리나라 '양복 1번지'였다. 1970년대 전성기엔 소공동에만 적어도 30~40곳 맞춤 양복점이 있었다. 결혼 앞둔 신랑과 혼주들이 줄 서서 원단 고르고 가봉(假縫)을 하던 거리였다. 2000년대 초만 해도 100만원짜리 맞춤 양복 상품권이 하루 수백장씩 발행되던 곳이다. 그러나 양복 맞춰 입는 이들이 줄고 도심 상권이 강남 등지로 분산되면서 양복점들도 문을 닫거나 소공동을 떠났다. 이제 소공동 양복점은 롯데백화점 본점 주변과 회현 지하상가에 10곳 정도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소공동 '아일랜드 콜렉션' 김환수(66) 대표는 "더 좋은 상권으로 가게를 옮길 생각은 아직 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소공동은 그러나 죽지 않았다. 최근 비스포크(수제 맞춤 양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공동의 핏줄'이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는 식으로 살아 있다. 소공동 출신 재단사 아들이 가업을 잇거나 젊은 창업자가 소공동 재단사와 함께 양복점을 차리는 식이다.

소공동에서 청담동으로 옮겨온 '세기테일러'가 대표적이다. 윤인중(74)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옷을 지었던 재단사다. 아들 윤일석(41)씨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007년 아버지의 양복점에 합류했다. 2010년엔 롯데호텔 지하에 있던 가게를 강남으로 이전했다. 아들 윤씨는 "패션이나 웨딩 문화 중심이 강남으로 움직이는 추세를 따랐다"고 했다.

이태원동 '비앤테일러'는 소공동에서 재단을 배운 박정열(67)씨가 종로에서 운영하던 '보령양복점'이 옮겨온 경우다. 아들 박창우(38)씨가 합류하면서 2006년 상호를 바꾸고 2014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재단과 바느질은 아버지가, 치수 측정과 가봉은 아들이 맡고 있다. 손님들에게 옷의 느낌과 스타일을 제안하는 일도 주로 아들의 몫이다.

청담동 '레리치'는 김대철(43) 대표가 소공동 재단사 10여명을 모아 2005년 차린 맞춤 양복점이다. 당시 재단사들이 김 대표 아버지뻘인 50~60대였다. 김 대표는 "오랜 단골들이 찾는 가게가 몇 곳 남아 있었지만, 이미 소공동은 양복 중심지로서 기능을 잃은 상태여서 강남을 택했다"고 말했다.

소공동은 양복 기술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맞춤 양복점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외국의 양복 본고장으로 나가 기술을 배우는 재단사들이 등장했다. 그중엔 귀국해 가게를 차리지 않고 한국에 가끔 들러 단골들 옷을 지어 주는 재단사도 있다. 소공동은 더 이상 맞춤 양복의 심장으로 기능하지 못하지만, 그 실핏줄은 세계까지 뻗어나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