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2.08 14:10

[다음 낱말의 뜻을 써넣으시오. ‘관크’, ‘잇템’, ‘얼리어먹터’, ‘포노사피엔스’, ‘스몸비’, ‘있어빌리티’, ‘츤데레’] 이러한 시험문제가 나온다면 몇 점을 받을까? 나는 0점일 게 틀림없다. 답을 하나도 적지 못할 것 같다. 외국어 비스무리해서 그렇다면, 한국어와 가까운 듯 보이는 이 낱말들은 또 어떤가? ‘패완몸’, ‘탕진잼’, ‘급식체’, ‘이생망’, ‘시발비용’, ‘자절남’, ‘행복회로’, ‘짤’…. 전혀 감이 안 잡힌다. 각종 온‧오프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서비스에서 “이게 뭔 외계어야?” 하는 물음표로 만났던 단어들이다.

최근 이런 신조어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5060 세대만 해도 그 뜻을 ‘척’하고 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딴에는 동시대 감각에 무뎌지지 않겠다고 보이는 대로 주워섬겨보지만, 통역이라도 있어야 할 판이다. 잠시 딴전 피는 사이 사방에서 낯선 단어들이 솟아난다. 게다가 괄호 안에 뜻풀이를 달아주는 친절함조차 없이 큰 제목으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줄임말은 물론이고 한국어와 영어의 혼합, 생소한 영어와 여타 외국어가 주를 이룬다. 게임에서나, 회사에서나 통한다는 말도 종종 신조어에 끼어든다.

앞서 문제의 해답을 ‘커닝’해 보았다. 관객+크리티컬(critical)을 줄인 ‘관크’는 공연장에서 앞 좌석을 발로 차거나 휴대폰을 사용하는 몰지각한 행위를 말한다. ‘잇템’은 잇(it)+아이템(item)으로 누구나 꼭 갖고 싶어 하는 것. ‘얼리어먹터’는 얼리어답터+먹다로 남들보다 먼저 신메뉴를 먹어본다.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에게 휴대폰은 정보원이자 신체 일부와 같다. ‘스몸비’는 스마트폰+좀비, ‘있어빌리티’는 있어 보인다+ability·능력. ‘츤데레’는 퉁명스러운 모습을 뜻하는 일본어 ‘츤츤’과 친하게 착 달라붙은 모습의 ‘데레데레’가 합쳐졌다.

답을 계속 들춰보자면, ‘패완몸’은 패션의 완성은 몸이란 말이다. ‘탕진잼’은 과소비에서 오는 재미이고, ‘급식체’란 급식 먹는 10대들의 은어.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해서 ‘이생망’이요, 스트레스를 받아 홧김에 지출해서 ‘시발비용’이다. 좌절남의 오타인 줄만 알았던 ‘자절남’은 자존심의 절벽에 서 있는 20대 남자 취업준비생. ‘행복회로’는 불행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행복한 상상을 만드는 뇌 내 신경회로이고, ‘짤’은 짧은 글을 곁들인 그림이나 사진을 일컫는다.

반짝하고 사라지기 십상

이밖에도 일일이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신조어 가운데 올 들어 자주 보이는 말은 ‘워라밸’이다.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 life balance)’의 약자로, 일과 삶의 균형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또, 파이팅을 뜻하는 ‘go’를 ‘가자’로 늘여서 발음한 ‘가즈아’는 신조어 같지 않은 신조어로 득세 중이다. 인터넷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랜(LAN)선과 합친 ‘랜선이모’ ‘랜선맘’ ‘랜선삼촌’, 먹고 요리하는 먹방·쿡방에 이어 커플의 일상을 영상에 담은 ‘커방’, 지나친 인기(hot)로 사람이 몰리는 걸 혐(嫌)오하는 ‘혐핫’도 눈에 띈다.

앞으로 한 해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신조어가 명멸할까. 살짝 비튼 재치와 달콤 쌉싸름한 유머에 감탄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이거, 같은 나라에서 같은 사람들이 쓰는 말 맞아?’ 싶은 말도 있다. 어쨌든 커닝한 걸 써먹어 본답시고 집안에서 꺼냈다가 “엄마, 그런 말 아무 때나 잘 쓰는 거 아니거든요”하는 면박으로 머쓱해지기 일쑤다. 이따금 돌아다니긴 해도 일상 대화에서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란 핀잔이다. 그때그때 상황마다 시선을 끌고, 자극을 더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말이기 때문일까?

언어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읽고, 듣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언어활동의 범위가 점점 커지는 덕이다. 어떤 말은 오랜 세월 뿌리 깊은 생명력으로 변치 않으면서 표현의 곁가지를 엄청 늘이며 자라간다. 세태를 압축해 반영하는데 재빠른 신조어는 소멸의 속도 또한 빨라 반짝하고 사라지기 십상이다. 마치 생활의 기본요소 3가지로 꼽히는 ‘의식주(衣食住)’를 위한 옷과 패션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옷의 차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대의상에서 생활복으로 자리 잡는 옷이 있듯이 일상에 뿌리내려 자라는 신조어도 있을 터이다.

중요한 건 옷에서나 말에서나 시간과 장소, 상황의 TPO(Time, Place, Occasion)를 살펴야 소통도 살아난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신조어를 뜬금없이 꺼낸 나야말로 이를 제대로 무시한 셈이다. 일부러 찢은 청바지를 입고 엄동설한의 거리에 나선 할머니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하기야 신조어야 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어떠하랴. 다만 단 하나의 말을 잘 헤아려 꺼내는데 마음을 온통 기울여도 부족할 따름이다. 최근 서울대병원 외벽의 현판에서 본 바로 이 말, 이 한 송이 말이다.

‘당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한 송이 꽃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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