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2.19 15:55

캐나다 여행기④

재작년 12월에 시작해 작년 1월에 끝난 드라마 중에 ‘쓸쓸하고 찬란한 神-도깨비’란 드라마가 있다. 작가의 마약 같은 필력 덕분인지 드라마 화면에 나오는 배경의 아름다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드라마에 푹 빠져 지냈다. 매주 금,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빠짐없이 시청했다. 드라마는 종영했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나를 잡아당기는 퀘벡의 풍경에서 그만 헤어 나오지 못했다. 퀘벡은 ‘쓸쓸하고 찬란한 神-도깨비’의 배경이자 아름다운 단풍 나라의 모습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어디 그뿐인가? 퀘벡의 아기자기한 도시 풍경은 또 어떻고.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이 올드 퀘벡으로 가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퀘벡은 그냥 작은 프랑스라고 하면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캐나다는 공용어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쓰지만, 퀘벡에서는 프랑스어만 쓰인다. 프랑스 출신이 90% 이상이다 보니 길거리 명칭도, 간판도, 사용하는 언어도 모두 프랑스어다. 퀘벡이란 도시는 1535년 프랑스인 자크 카르트에 의해 알려져 프랑스인들이 이주해 와 만들어진 마을이다. 퀘벡에는 올즈 퀘벡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구시가지인 셈이다.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과 18세기 초 프랑스풍의 건축물들이 이방인을 맞이하는 마을이다. 성곽 안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걸으면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도시라고 해서 난 지금 그곳에 가는 것이다.

프티 샹플랭

올드 퀘벡에 도착하니 비가 내렸다. 구경하는 내내 비는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했다. 문득 드라마 도깨비의 명대사,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라는 말이 떠올랐다. 올드 퀘벡은 말 그대로였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비 그치면 비 그치는 대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서둘러 흔히 ‘가장 사랑스러운 거리’라고 불리 는 프티 샹플랭으로 갔다. 거리로 내려가는 ‘목 부러지는 계단(Escalier Casse Cou)’ 위에 올라서니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험상궂은 이름이 붙은 것은 계단이 너무 가팔아서다. 자칫 넘어지면 목이 부러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은탁이 도깨비 공유에게 시집가겠다고 투닥투닥 싸우던 곳이다. 비까지 내리니 겁이 났다. 혹여나 넘어져 목 부러질까 봐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다행히 우리뿐이라 한가롭게 골목길을 내려갈 수 있었다. 프티 샹플랭이라는 이름이야 생소하지만, 계단을 내려오니 정말로 눈에 익은 거리다. 바로 도깨비에서 은탁이가 빨간 문 하나만 열면 나타났던 거리이기 때문이다. 예뻐도 너무 예쁜, 아기자기한 상점과 카페, 레스토랑, 토산품 판매점이 눈과 마음을 잡아끈다.

문을 찾아야 했다. 도깨비 공유와 은탁이 캐나다로 오기 위해 드나들었던 빨간 문을 찾고 싶었다. 천천히 프티 샹플랭 거리를 걸어 내려간다. 엽서 파는 가게 앞에 잠시 서면 예쁜 엽서에 반해 한 장 사고 싶어진다. 그릇가게 앞에서도 그랬다. 그릇이 이렇게 예뻐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다 하나 살까 싶어 문을 찾아 들어서다 재빨리 돌아섰다. 그동안 경험에 의해 사 가봐야 별로였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 탓이다.

걷다 보니 핼러윈 때 귀신 쫓으라고 둔 주황색 커다란 호박이 아직 그대로 창문 앞에 놓여 있다. 비가 내리니 그냥 한 폭의 풍경화다. 얼른 사진 한 장 찍고 돌아 선다. 이 마을을 그린 그림 가게도 보인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마을풍경을 담은 엽서를 한 장 사서 몇 자 적어 집으로 보냈을 것이다. 아무리 비가와도 좋다지만 비가 내리는 그마저 번거롭다. 눈에 담고 말아야지 하면서 작은 카페를 지나니 화장실이 보인다. 여행지에서 화장실이란 보면 무조건 달려가야 한다. 후다닥 다녀와야지 하면서 달려가다 말고 멈칫 섰다. 어디선가 봤던 문이다. 아~~~ 도깨비에 나오던 그 빨간 문이다. ‘어머, 이곳에선 한 장 찍어야 돼’라는 생각에 인증 사진을 찍고 다시한번 살펴본다.

순간 머릿속에서 떠돌던 환상 하나가 스르르 사라진다. 세상에 도깨비는 없다. 당연히 도깨비 문도 없었다. 프랑스어는 할 줄은 몰라도 그림은 볼 줄 안다. 빨간 문 옆에 안내도가 한 장 붙어 있다. 극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비상시 대피로가 그려진 안내도다. 그럼 이 문이 비상시 극장 대피로? 비상문? 쓴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혹여나 없는 도깨비를 만날까 하여 조심히 문고리를 잡아당겨 본다. 미세한 흔들림만 느껴질 뿐 열리지 않는다. 허탈하다. 잊지 못했던 첫사랑을 환갑이 넘어 만났을 때 감정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냥 두었으면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겨졌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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