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부권(父權) 소송제' 도입이 추진되고, 소비자가 기업 때문에 피해를 봤다면 직접 소송에 참여하지 않아도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의 '집단소송제' 도입이 검토된다. 또 소송 과정에서 법원이 기업에 영업 비밀에 해당하는 자료 제출을 요구해도 기업이 무조건 응해야 하는 '자료 제출 의무제' 도입이 추진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2일 이런 내용의 '법 집행 체계 개선 태스크포스(TF)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법 집행 체계 개선 TF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작년 8월 공정거래법 집행 시스템을 개편하기 위해 내외부 전문가를 모아 만든 것이다. 공정위 부위원장을 위원장으로, 외부에선 김남근 변호사, 오동윤 동아대 교수 등 법조계 및 학계 인사 10명이 참여했다. 각 인물의 성향을 감안해 편향성 없이 구성했다는 게 공정위 설명이다.
공정위는 TF의 권고안을 바탕으로 공정거래법 개정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하지만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내용이 많아 재계가 반발할 것으로 보인다. 또 입법 과정에서 야당의 반대가 예상돼 실제 현실화할지는 미지수다.
◇소비자 피해 소송 간편해져
권고안은 크게 피해자 구제와 기업 처벌 관련 내용으로 구분된다. 권고안은 우선 집단소송제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기존 집단소송제는 기업의 불공정 행위로 피해를 본 소비자들이 소송 당사자로 참여해야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데, 재판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도 배상을 받을 수 있게 제도를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권고했다.
TF는 또 소송을 제기하기 어려운 피해자를 대신해 국가가 공익적 관점에서 기업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부권 소송' 도입에 대해 긍정적 의견을 표명했다. 힘이 약한 피해자를 대리해 국가가 마치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원고가 된다는 점에서 '부권 소송'이란 이름이 붙었다. 공정위는 다만 "전 세계에서 미국만 제한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제도라 실제 도입하기까지는 많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송 과정에선 법원이 기업을 상대로 피해자의 증거 확보에 도움이 되는 자료 제출을 요구하면 기업이 응해야 하는 '자료 제출 의무제'를 공정거래법에 규정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영업 비밀이라 하더라도 법원이 명령하면 기업은 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없다. TF는 "서류, 전자 문서, 동영상, 사진, 도면 등 형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료를 제출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며 "법원 제출 요구에 불응하면 기업이 관련 혐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공정위가 독과점 기업을 상대로 기업 분할 명령 등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장 구조 개선 명령제' 도입에 대해선 TF 내에서도 찬반이 엇갈렸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언젠가 한국에도 시장 구조 개선 명령제가 도입되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그렇게 시급한 과제는 아니지 않으냐는 판단을 잠정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계 "권고안 시행되면 기업에 악몽"
TF 권고에 대해 재계는 "기업 활동을 제한해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정부가 기업을 손보는 수단으로 이런 제도를 악용하면 적잖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현재 소비자기본법상 소비자 단체가 나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데, 집단소송을 확대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며 "자료 제출 의무 등으로 기업의 소송 비용이 증가하면 원가 경쟁력 하락을 초래해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법률적 위험이 커지면서 경영 활동이 위축되는 등 기업가 정신을 저해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부권 소송에 대해선 경제적 약자를 돕겠다는 취지는 긍정적이지만, 정부가 기업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제도가 악용될 위험이 크다는 얘기가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 단체 관계자는 "부권 소송에서 기업은 구체적 법률 관계보다 대(對)정부 관계를 더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정부가 국민에게 박수 받을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기업에는 악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권(父權) 소송
기업의 불공정행위 때문에 피해를 본 소비자를 대신해 국가가 공익적 관점에서 기업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후견소송(parens patriae action·라틴어)이라고도 부른다. 힘이 약한 피해자를 대리해 국가가 마치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원고가 된다는 점에서 ‘부권(父權)’이란 이름이 붙었다. 미국에만 도입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