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요지경', 30년대 히트곡인 것 아시나요

유성기 소리를 들어볼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이경호(64)씨가 자신의 집 골방으로 안내했다. "음악을 불러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의 손발이 조심스럽고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유성기 음반(SP·Standard Play)이 가득한 수납장에서 1958년 황정자의 노래 '처녀뱃사공'이 담긴 음반을 꺼내 유성기 위에 살포시 올렸다. 종이 상자에서 깨끗한 재생 바늘을 찾아내 사운드박스에 달고, 유성기 옆에 달린 손잡이를 힘껏 돌려 태엽을 감고, 돌아가는 음반 위에 바늘을 올렸다. '지지직' 소리가 10초간 방을 메우더니 비로소 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토록 고생스레 음악을 듣는 이씨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유성기 음반을 모은 수집가다. 지난 26일 찾은 서울 대치동 그의 집에는 1920~60년대 발매된 우리나라 SP 2000여장이 그득했다. 실물로 전해지는 한국 SP 중 가장 오래된 1923년 '학도가'부터 가격이 1000만원이 넘는다는 한국 최초의 캐럴 윤심덕의 '파우스트노엘'(1926)까지 소장하고 있다. 이씨는 이 음반들에 담긴 역사를 소개한 책 '대중가요 유성기 음반 가이드북'〈작은 사진〉을 최근 펴내기도 했다.

그가 LP도 아닌 SP를 30년간 모은 이유는 유성기가 전축(電蓄)보다 더 원형에 가깝기 때문이다. "유성기는 수동으로 소리를 내지만 전축은 전기를 쓰잖아요. 전기를 이용하면 소리가 두 번 왜곡됩니다. 녹음할 때 한 번, 음악을 재생할 때 또 한 번. 반면 유성기는 음반의 소릿골에서 나온 음을 전기의 개입 없이 그대로 냅니다. 가수의 실제 목소리 다음으로 자연스러운 음이죠. 그래서 음악을 재생하는 게 아니라 가수를 불러낸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나라에는 1900년대 초 일본을 통해 SP가 최초로 들어왔다. 이후 1958년 LP가 등장할 때까지 약 1만장의 SP가 발매된 것으로 추산된다. "LP에 푹 빠져 살던 1960년대 고등학교 시절 친구 집에서 우연히 유성기를 보게 됐어요. LP에서는 느낄 수 없던 물성(物性)이 느껴지더군요. 물건이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SP는 한번 녹음하면 나중에 음원을 편집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시대의 생생한 역사가 담기기도 한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금메달을 딴 것을 기념하려고 채규엽이 낸 음반 '마라손 제패가'(1936)가 그렇다. 음반 뒷부분에 손기정 선수가 일본의 강요로 '우승의 감격'이란 제목의 글을 낭독했는데 손기정은 '일장기' '일본 국민'을 일부러 작게 말했다. '일본 국민의 승리' 부분을 차마 끝까지 읽지 않자 누군가 "크게 읽어, 크게 읽어"라고 재촉한다. 이씨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한이 소리로 남은 역사적 사료"라며 "30년 가까이 찾던 이 음반을 한 골동품상에게서 우연히 구했을 땐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 음반을 들려 달라고 하자 이씨는 "자꾸 플레이하면 음반이 상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같은 이유로 그 역시 음반 수록곡들을 MP3 파일로 변환해 듣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SP를 수집하며 잊힌 우리 대중가요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 노래를 듣는 재미만큼이나 크다"고 했다. "오죽하면 가수 신신애의 1993년 곡 '세상은 요지경'이 1938년 이미 유행한 노래였는데 이를 아는 이가 없어 한참 뒤에야 표절 논란이 일었을까요."

전기 절연제품 생산 업체 '스웨코'의 대표인 이씨는 앞으로도 SP를 계속 수집할 계획이다. "SP가 유통됐던 때 우리나라는 어둠의 시대를 거쳤지만 그 아픔을 달래는 대중음악은 오히려 빛났습니다. 앞으로도 SP를 계속 모으며 그 시대를 오늘로 불러올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