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지울 수 있어 거침없이 쓴다, 연필이 나의 힘

'연필로 글을 쓰면 팔목과 어깨가 아프고, 빼고 지우고 다시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다. 그러나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살아 있는 육체성의 느낌이 나에게는 소중하다…지우개는 그래서 내 평생의 필기도구다. 지우개가 없는 글쓰기를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지워야만 쓸 수 있고, 지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므로 나는 겨우 두어 줄씩 쓸 수 있다.'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중.)

소설가 김훈은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집필실에서 하루에 4~5시간 '연필 노동'을 한다. 엄지와 검지, 중지에 온 신경을 집중해 200자 원고지를 채웠다가 지우기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원고지가 글로 꿈틀댈 때마다 뼈를 갉아내듯 뾰족한 연필은 짧아지고 모난 지우개는 뭉툭해진다. 약 4시간의 연필 노동을 마치고 나면 그의 손은 흑연이 묻어 기름때 잔뜩 낀 어느 노동자의 손처럼 새까매진다. 연필을 잡았던 손가락은 굳은살로 두꺼워지고 글의 때 같은 지우개 가루와 쓰임을 다한 나체의 몽당연필들이 비로소 책상 위를 나뒹군다. 책상 위 눈처럼 쌓인 지우개 가루들을 보면 '실패한 말의 찌꺼기'를 보는 것 같아 한숨이 나오고 온 힘을 다한 몽당연필의 흑심이 뚝 부러져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할 땐 측은지심마저 밀려온단다. 그 순간을 김훈은 "마치 오래 신은 신발이 다 해져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할 때의 기분과 똑같다"고 표현했다.

디지털 시대에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소설가 김훈은 연필을 '밥벌이 도구'라고 말했다. "나의 연필은 구석기 시대 처자식을 먹여 살리던 돌도끼나 마찬가지예요. 내 삶의 육체성이 가득 차 있죠."

인간이 만든 작고 견고한 도구인 연필은 그에게 생업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장비이자 작가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인생 문구'인 셈이다. 연필로 글을 짓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어도 다른 도구로 갈아탈 생각은 없다.

"도구를 바꾼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동양화가들이 물로 심오함을 표현하고 서양화가들이 기름으로 다채로움을 표현하지만 동양화가가 기름으로, 서양화가가 물로 그림을 표현해내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도구를 바꾼다는 것은 도구에 따라 모든 표현 기법을 싹 바꾼다는 것이죠. 작가에게 도구의 교체는 문명을 건너 타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김훈의 연필처럼 창작자에게 문구는 작업 도구이면서 '생필품'이다. 연필 하나에 희비가 엇갈리고, 펜 하나에 당락이 좌우된다. 지우개로 실수를 만회하고, 하얀 종이 위에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3월, 새봄과 새 학기가 시작되는 달. 문구 얘기를 나누기에 좋은 시기다. 명사들에게 필통과 서랍 한구석에서 그들의 치열한 삶의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인생 문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문학적 시선으로 문구를 바라본 책 '문구의 모험'엔 대문호들과 함께한 문구 이야기가 나온다. 헤밍웨이는 공책, 연필, 연필깎이를 분신처럼 들고 다녔다.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의 저자 존 스타인벡은 1934년 에버하드 파버가 출시한 연필 '블랙윙 602' 애호가로 유명하다. 존 스타인벡은 블랙윙 602에 대해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진다'고 극찬했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설가 토니 모리슨은 한 인터뷰를 통해 노란색 리걸 패드와 2호 연필을 좋아한다고 했다.

때로 잘 고른 연필 한 자루가 명작을 탄생시키는 영감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스마트 문구가 쏟아지는 디지털 시대에 창작을 업(業)으로 하는 명사들의 필통에, 셔츠 주머니에, 가방에 들어 있는 단 하나의 인생 문구들을 들여다봤다.

가수 김현철의 샤프

가수 김현철은 중학교 때부터 제도샤프 0.5㎜만 쓰고 있다. 당시 지인이 집에 놀러 왔다가 잃어버리고 간 제도샤프를 '주워' 쓰며 제도샤프와의 긴 인연이 시작됐다.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제도샤프를 쓰는 학생은 흔치 않았어요. 그때는 건축이나 제도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나 일부 대학생이 쓰는 경우가 많았죠. 희한하게 제가 제도샤프를 쓰기 시작한 그즈음 제도샤프를 쓰는 친구가 확 늘었어요."

89학번인 그는 제도샤프로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를 공부했고, 학력고사를 치렀다. 지금도 작업실, 방, 방송국, 가방 네 군데 2개씩 두고 쓰거나 갖고 다닌다. 스케줄 메모도 오직 제도샤프로만 한다. "볼펜으로 적는 것은 입국카드밖에 없을 정도"로 제도샤프를 애용하고 있단다.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교과서 밑줄 치고 적을 때 항상 제도샤프로 표시했어요. 그 흔한 색깔 펜 하나 안 썼죠. 샤프심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도샤프를 쓰면서 알게 된 건 샤프심 색깔이 참 오묘하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갈색빛이 돌고, 어떻게 보면 파란빛도 돌고. 샤프심이 부러지거나 짧아져 샤프 구멍이 막혔을 때 샤프심으로 그걸 뚫을 때의 쾌감도 무시할 수 없죠. 제 아들에게도 '제도샤프'를 물려주고 싶어요."

건축가 임형남의 붓펜

"펜은 제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끄집어내고 구체화시켜 주는 도구죠. 영감을 종이로 유인해주는 도구랄까요? 빈 땅을 보고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건축가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야 하는 창의적인 직업인 만큼 번뜩이는 생각을 가장 빠르게 표현해내는 필기구가 필요해요. 크로키할 땐 붓펜만 한 게 없어요. 선을 이리저리 긋다 보면 일필휘지하는 느낌도 들고 그러다 보면 뭔가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강약이 있으니 감정을 담기에도 좋고요."

건축가 임형남 가온건축 대표는 일본의 필기구 브랜드 '펜텔' 포켓용 붓펜을 항상 들고 다닌다. 7~8년 전 유명 만화가들이 붓펜을 쓰는 걸 보고 따라 써봤는데 이후 붓펜 없이는 작업이 안 될 정도로 '집착'하게 됐단다.

"펜텔사 붓펜은 진짜 붓처럼 얇은 모로 만들어 붓으로 쓰는 필기감을 느낄 수 있어요. 1만원대로 저렴한 편이고 잉크를 갈아 끼울 수 있는 카트리지 방식이라 휴대하기에도 편리하죠."

펜을 구입하는 곳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미림화방'. 인사동에 갈 때면 방앗간처럼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장비 욕심'도 많다는 임 대표는 붓을 비롯해 다양한 필기구를 만날 수 있는 일본의 필방, 화방도 줄줄 꿰고 있다. 교토에 가면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필방 '규쿄도(鳩居堂)' 본점을, 도쿄에 가면 신주쿠에 있는 문구점 '세카이도(世界堂)'와 '문구덕후'들의 성지 투어 코스로 꼽히는 긴자의 화방 겸 문구점 '이토야(伊東屋)' 등을 지나치지 못한다.

"잘 고른 필기구 하나는 적은 투자 비용에 비해 무한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해요. 요즘 말로 치면 '소확행(小確幸·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죠. 그래서 그 행복을 찾기 위해 필기구 사냥을 나서나 봅니다."

일러스트 작가 밥장의 노트

10년 넘게 이탈리아 노트 전문 브랜드 '몰스킨' 수첩만 쓰고 있다. 지독한 '몰스킨 덕후'.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 '믿는 구석'의 책장엔 그동안 써온 몰스킨 수첩들을 모아뒀다. 10년 동안 깨알같이 남긴 기록물들이다. 일러스트 작가다 보니 일러스트용도 있지만, 아이디어 노트, 여행 노트, 독서 노트 등으로 세분화돼 있다.

용도에 따라 쓰는 펜도 다르다. 줄 없는 무지 스타일의 아이디어 노트는 편안하게 드로잉하거나 쓱쓱 끼적일 수 있는 있는 2B연필을, 그림을 그릴 땐 무지 노트에 라이너펜, 독서 노트를 쓸 땐 줄노트에 만년필을 이용한다.

"몰스킨 노트는 시간이 지나도 디자인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이에요. 어떻게 보면 심심할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쓸 때마다 나만의 창의성을 담아 맘껏 꾸밀 수 있고 나만의 것이라는 애착이 강하게 들어요. 유명한 작가, 창작가들이 많이 쓰는 걸로 유명한데 사실 몰스킨이란 노트가 특별하기보다 꾸준히 기록하면 특별해지는 거죠. 필기구도 마찬가지예요. 필기구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필기구로 어떤 것을 기록하느냐에 따라 특별해지는 거 아닐까요?"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작업량이 풍부해졌다. '몰스킨으로 쓰고 그리다'에 이어 최근엔 캠퍼밴을 타고 40일간 여행했던 기록을 묶어 '호주 40일'이란 책을 펴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프로젝트, 여행 기록 등 저의 모든 것이 노트 안에서 이뤄지고 있어요. 그래서 제겐 특별한 가치가 있는 인생 문구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최인아의 색연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최인아 책방'의 최인아 대표는 연필과 샤프, 색연필을 두루 쓴다. 펜은 잘 안 쓴다. 쓴다면 얇은 것보단 굵은 펜을 쓴다. 연필과 색연필을 주로 쓰는 이유는 '깎는 재미' 때문이다. 연필깎이란 편리한 도구가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칼로 직접 연필을 깎는다.

"가구 중에서 책상을 참 좋아해요. 책상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요. 특히 마음이 부산한 날 책상에 앉아 연필을 깎고 있으면 무심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마치 참선의 공간에서 마음을 다잡으며 수양하는 것처럼요."

연필과 색연필은 쓸 때마다 사각거리는 느낌도 좋다. 주로 책에 밑줄 치는 용도로 사용한다. 진하고 튀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형광펜 같은 건 쓰지 않는다. 문구를 가까이는 하지만 고집하는 브랜드는 없다. 현재 쓰는 색연필은 오래전 제일기획 재직 시절에 샀던 '까렌다쉬 12색'. 오래 쓰다 보니 12색 중에서도 다른 것들에 비해 특히 짧아지는 것들이 있는데 오렌지, 밤색, 초록색 순. 쓰다 보니 취향이 확실히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연필과 색연필은 쓰임 그 자체의 목적보단 깎는 행위를 통해 바쁜 일상에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물건이네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김재원 필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카페 '오르에르''자그마치'와 편집숍 '더블유디에이치(W×D×H)'의 김재원 대표는 필통이 2개다. "어린 시절 판박이와 메모지 수집부터 시작해 대학 시절에도 다른 친구들은 립스틱을 모을 때 그 돈으로 문구류를 수집했어요."

필통도 감각적인 디자인 문구류들로 가득하다. 몰스킨 노트, 필기구, 클립부터 연필깎이, 스테이플러와 심까지 들어 있는 파우치 형태의 큼지막한 그녀의 필통은 그 자체가 작은 문방구. 중요한 서명을 할 때 사용하는 만년필도 별도로 갖고 다닌다. 실제로 "어렸을 때 꿈이 문방구 주인이었다"는 김재원 대표는 편집숍 'W×D×H' 안쪽을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 코너로 꾸몄다. "문구는 작업을 윤택하게 해주고 사소한 유용함과 사소한 즐거움을 줘요."

국내 '핫트랙스' '북바인더스디자인' '오벌' 등 문구 매장은 물론 일본의 화방 겸 문구점 '이토야'와 '겟코소(月光莊)' 등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틈틈이 독일, 체코 등 해외 문구 사이트에 들어가 제품 구경만 해도 행복하단다. 그녀가 인생 문구로 꼽는 것은 학창시절부터 사용해온 '파버카스텔 이모션 트위스트 펜슬'.

"학생 신분으로 사기엔 꽤 비싼 가격이어서 오랜 시간 애지중지하다 보니 애착이 가요. 문구는 사소하기 때문에 쉽게 사고, 쉽게 버리고 때로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그 하찮은 물건이 주는 가치를 깨닫는 순간 함부로 할 수가 없게 되죠. 비록 책상 위와 서랍은 점점 복잡해지지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