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3.15 01:00

제천 한수면·화순 한천면·안동 녹전면·춘천 북산면
'신생아 0명' 농촌은 지금…

농사 말고는 일거리 없어 출산 가능 젊은 부부 유입 안돼
노인들만 사는 시골, 상권도 침체

'청년층 실종→마을 경제 붕괴→최악 출산율' 악순환에 빠져

지난 8일 오후 2시쯤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1리 왕복 2차로 도로. 허리가 굽은 80대 할머니가 보행기에 의지해 갓길을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30분 만에 유일하게 목격한 마을 주민이다. 이발소와 음식점, 수퍼마켓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방치된 폐가만이 마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아기 낳아줄 젊은 사람이 없어. 10~20년 지나 우리가 죽으면 부락이 다 사라질 거야." 경로당에서 할머니 6명과 부침개를 먹던 주민 최명자(69)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365일 넘게 아기 울음 끊긴 마을

한수면에선 지난해 신생아가 단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지난해 '신생아 0명' 지역 17곳 중 하나다. 본지가 한수면을 비롯해 전남 화순군 한천면, 경북 안동시 녹전면, 강원 춘천시 북산면 등 4곳을 찾아가 보니 이구동성으로 "아이 낳을 젊은 여성이 없다"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저출산과 고령화 심화로 농촌 마을이 사라지는 '지방 소멸'이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왔다.

지난 8일 오후 전남 화순 한천면 한계리에서 한 노인이 도로 갓길을 지나가고 있다.
마을 지키는 건 노인뿐… - 지난 8일 오후 전남 화순 한천면 한계리에서 한 노인이 도로 갓길을 지나가고 있다. 이 마을은 지난해 신생아가 한 명도 태어나지 않은 17곳 중 하나다. 전문가들은 농촌 지역 읍·면·동 10곳 중 1곳은 25년 뒤 소멸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조홍복 기자
한수면은 충북에서 인구가 744명으로 가장 적다. 여성 인구 367명 중 가임 여성(15~49세)은 77명(20%)에 불과하다. 20~39세 여성은 30명(8.1%)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2012~2017년 6년간 한수면 신생아는 고작 9명뿐이었다. 올해도 출산 전망이 어둡다.

지난 10일 경북 안동시 녹전면 갈현리 경로당은 모처럼 웃음이 넘쳤다. 2년 전 19세 연하 이주 여성과 결혼한 주민 임용기(43)씨가 최근 득남했기 때문이다. 녹전면에선 지난해 출산이 없어 12개 마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과 농사를 짓는 주민 강옥순(76)씨는 "아기 보기가 드문 요즘 이런 경사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아기 울음소리를 더 듣기는 힘들다. 녹전면 주민 1892명 중 20~39세 여성은 98명(5%)에 불과한 탓이다. 최근 3년간 녹전면 출생아는 6명뿐. 그나마 태국·필리핀에서 건너온 이주 여성의 아이들이다.

지난 8일 오후 전남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한천면사무소에는 직원 15명 말고 주민이 보이지 않았다. 이발소, 방앗간, 다방, 술집, 식당, 수퍼마켓 등이 들어섰다는 면사무소 주변 상가 건물들은 하나같이 1990년대 초반 문을 닫았다고 한다. 한천면 여성 인구 692명 중 20~39세 여성은 62명(8.9%)에 불과해 최근 6년간 신생아는 13명에 그쳤다.

지난 9일 강원 춘천 시내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춘천 북산면 오항리도 적막했다. 주민 김일택(65)씨는 "오항리만 놓고 보면 마을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어본 지가 한 8년은 넘었다"며 "젊은 사람이 없는데 아기가 하늘에서 똑 떨어지겠느냐"고 말했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3월까지 북산면에 출생신고를 한 신생아는 한 명도 없다. 주민 박금순(65)씨는 "은퇴자만 찾지 젊은이가 없어 활기가 돌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민 최주봉(74)씨는 "여기가 면 소재지인데도 이런데 다른 동네는 더 심하다"며 "늙은이만 있어 장사가 안돼 상가가 대부분 폐업했다"고 말했다.

◇"이주 여성이라도… 젊은 여성 모셔라"

출생아 0명 지역은 공통적으로 '경제 기반 붕괴→활력 상실→젊은 여성 실종'이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심화하고 있다. 한때 전남 화순 한천면은 탄광업으로 호황을 이뤘다. 1968년 설립된 한천면 오음리 호남탄좌 화순광업소는 지역 산업의 중심이었다. 주민 김용학(72)씨는 "1980년대 광업소에서 2000명이 넘게 일했고, 마을에 사택이 세 군데 있었다"며 "한천면은 화순 13개 읍·면 중 둘째로 큰 면이었다"고 말했다. 이 광업소가 1992년 폐광 처리되면서 지역이 침체에 빠졌다. 박병길 한천면장은 "젊은 사람이 와도 소규모 복숭아·자두 재배 말고는 소득을 올릴 만한 일거리가 없다"고 말했다. 충북 제천시 한수면은 월악산 국립공원 관광객 급감으로 관광업이 붕괴하고 있다. 장사가 안되자 충주 등 가까운 도시로 젊은 사람이 대거 빠져나간다. 박종유(69) 송계 2구 이장은 "일거리라곤 변변찮은 농사뿐인데 젊은 사람들이 버티겠느냐"고 말했다.

각 지자체는 이주 여성을 포함한 젊은 여성 모시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애 낳고 살 만한 농촌을 만들어야 지방의 미래가 있다'는 목표로 청년 신혼부부 임대주택 공급, 출산장려금 지원 확대, 임신에서 양육까지 일괄 지원 등의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양질의 다양한 일자리가 없어 백약이 무효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방 소멸' 저자 마스다 히로야는 "지방에서 젊은 여성이 사라져버리면 다음 세대가 태어날 수 없다. 지방에 매력적인 고용 기회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가 오늘날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됐다"고 했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현 추세를 바꾸려면 새로운 기회를 찾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겨냥해 고용 기회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