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48-1호
- 공식명칭 :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平昌 月精寺 八角 九層石塔)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고려시대
- 소재지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월정사 (동산리)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국보 제48-2호
- 공식명칭 :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 지정일 : 2017. 01. 02
- 분류 : 유물/불교조각/석조/보살상
- 수량/면적 : 1구
- 시대 : 고려시대
- 소재지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월정사 (동산리)
월정사 석조보살상은 팔각구층석탑의 남쪽 전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탑을 향해 무엇인가 공양을 올리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 점에서, 원래부터 탑과 공양보살상은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민지(閔漬, 1248∼1326)가 찬한『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의 「신효거사친견오류성중사적(信孝居士親見五類聖衆事跡)」에 “탑 앞에 약왕보살의 석상이 손에 향로를 들고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전해오기를 이 석상은 절 남쪽의 금강연에서 솟아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모습과 꼭 일치한다. 이에 따라 이 보살상은 대체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6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근거하여 조성된 ‘약왕보살’로 일컫는다. 석조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며, 안정되고 균형 잡힌 자세와 알맞은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보관과 귀걸이, 팔찌, 가슴 영락 장식 등 세부표현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와 같은 탑전(塔前) 공양보살상은 이전에는 찾기 힘든 고려 전기적 특징인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도상과 구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또한 강원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고려 불교조각의 지역성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보살상과 세트로 조성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어 있고, 석조보살상은 보물 제139호로 별도로 지정되어 별개라는 느낌을 줄 수 있으므로, 이미 국보로 지정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묶어 국보로 지정하는 것이 조성 당시의 조형적, 신앙적 의미를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청]
국보 제48호는 보기 드문 팔각구층탑이다.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절집 마당에 우뚝 서 있는데 구층탑 앞에 무릎 꿇은 공양상이 따로 보물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별도로 지정되기보다는 하나로 묶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지난해 초에 국보 제48-2호로 승격되었다. 자연스레 국보 제48-1호 팔각구층탑과 국보 제48-2호 석조보살좌상으로 구분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례 화엄사에 있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도 석탑 앞에 공양상이 있지만, 국보 제35호로 단일지정하였듯이 굳이 48-1호, 48-2호로 부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공양상이 추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점이 다르다고 하겠지만, 그야 설명문에서 언급하면 될 일이라고 본다. 문화재 행정이 너무 복잡해서 하는 말이다.
또한, 문화재청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이처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는 경우 그냥 일련번호가 빠져 있는데 그보다는 일련번호는 그대로 놔두고 해당 번호에 언제 국보 몇 호로 승격되었다든지 보물에서 해제되었다는 등의 상세한 설명을 해 놓는 것이 문화재를 찾아보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지금은 그냥 건너뛰니까 그 번호들은 어찌 되었지? 하는 의문을 풀 수가 없어 답답하다.
월정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을 두루 품은 깊은 산 속에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평지지형에 차분하게 자리 잡은 절집이다. 지금의 건물들은 6·25전쟁 때 소실되어 대부분 근래에 다시 지었는데 사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역사가 깊은 절이다. 지금도 조계사 제4교구 본사로 강원도 일대의 사찰이 모두 월정사의 말사로 편성된 큰 절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중국으로 유학하여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의 사리와 가사를 전해 받은 자장율사는 이곳 오대산으로 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했으나 뵙지는 못하였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중 중대(中臺)에 진신사리를 모셔 적멸보궁이 되니 5대 적멸보궁 중 상원사 적멸보궁이 그것이다.
이후 나말여초(羅末麗初)에는 9산 선문 중 하나인 강릉 사굴산문의 영향권에 들어가지만, 고려말 나옹선사, 조선조 사명당이 주석하면서 월정사의 위상은 높아졌다. 이곳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는 오대산 사고(史庫)가 들어오면서 억불숭유의 조선에서도 국가적 지원과 배려를 받았다. 사세(寺勢)는 번성하였으며 사굴산문의 본산 굴산사가 오대산의 영향권으로 편성되게 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방한암 스님과 탄허스님, 만화스님으로 이어지는 유명 선승들이 주석하면서 지금의 월정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마당에 세워진 팔각구층석탑은 전체적으로 8각의 모양이면서 2층의 기단 위에 9층을 올린 석탑으로 특이한 금동장식의 상륜부도 나름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8각은 불교의 실천수행에 기본이 되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는 해석이다.
월정사 창건이 자장율사에 의한 일이라면서 이 팔각구층석탑도 그때 세워졌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당시 석탑은 대부분 방향(네모) 삼층 또는 오층탑 형식이었음을 볼 때 팔각형으로 구층을 올린 석탑양식은 고려 시대일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같은 다각다층석탑은 만주를 비롯한 북방 고구려 양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묘향산 보현사의 팔각십삼층탑 등이 남아있으나, 이 월정사 탑의 높이가 15.2m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이다.
4개의 돌로 된 지대석 위에 하층과 상층, 2층으로 이루어진 기단부는 하층의 경우 면마다 안상을 2개씩 새겼으며 연화무늬를 새긴 갑석을 덮어 마치 불상을 받치는 대좌의 느낌이다. 그 위로 굄돌을 하나 놓아 상층기단을 조심스레 받치는데 상층기단에는 면마다 기둥을 새긴 후에 갑석과 굄돌을 얹어 그 위로 9층의 탑신을 올렸다. 부처의 사리를 넣은 탑신이 부처의 진신이라면 부처님을 연화 대좌 위에 방석(굄돌)을 깔고 모신 셈이다.
9층의 탑신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석재를 이용하였다. 어떤 것은 하나로 어떤 것은 2~3개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층마다 오를수록 줄어드는 체감률이 크지 않지만 9층이라는 높이가 하늘로 솟아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1층 몸돌에는 8면 중 네 곳에 감실을 조각하였다. 그중 남쪽 감실이 크고 문틀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2층 이상 몸돌에는 감실은 보이지 않고 9층 모든 몸돌마다 기둥조각(우주)을 새겼으며 지붕돌 모서리마다 풍탁이 달려있어 그 꾸민 정성이 대단해 보인다. 또 지붕돌 아래 층급받침은 모두 3단인데 직선과 곡선이 섞어서 새겼으며, 바깥쪽으로는 낙수홈을 파는 세심함을 볼 수 있다.
이 팔각구층석탑은 여러 번 화재를 입어 지난 1970년에 해체 보수하며 1, 2, 6, 9층을 새로이 교체하였다. 내부에서 여러 점의 사리구 유물이 나와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으나 연대를 확인할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국보 제48-2호 석조보살좌상
석탑 앞에 공양상을 세우는 유형은 국립춘천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124호 한송사터 석조보살이나 보물 제84호 신복사터 석조보살 등 강원도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형태다. 이곳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 석조보살좌상은 너무 마멸이 심해서 원본은 성보박물관 안 실내에 보관 전시 중이다. 탑 앞에는 모조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어딘지 좀 생뚱맞아 보인다.
부처님을 의미하는 팔각구층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공양을 드리는 모습으로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체가 하체보다 크고 정중앙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한 것은 보는 사람들의 착시를 고려한 의도적인 배치로 보인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고, 관 아래로 나온 머리카락이 좌우 어깨 위로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입고 있는 천의(天衣)는 영락등 장신구가 화려하다.
이 공양보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약왕보살상(藥王菩薩)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모은 모습이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사리탑을 공양하는 모습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특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무튼, 월정사에서는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임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다고 한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고 한다. 환희심에 가득한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 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것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을 두 팔을 태우며 칠만 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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