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3.20 15:09

누군가의 휴대폰 울림이 강하게 들렸다. 친구 M이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딸 전화인 모양이다. 몇 마디 주고받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가 봐야겠단다. 딸이 손녀를 데리고 오는 중이란다. 일이 있으니 잠깐 맡아 달란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명령을 받았으니 지체 없이 출동해야 한다. 이쯤 되면 ‘진돗개 하나’ 발령인 셈이다. 신나게 하던 얘기를 마무리도 않은 채 쌩하고 가버린다.

애들 안 봐주겠다고 목소리 높였던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오늘 나만 해도 그렇다. 손자나 손녀들 안 봐 주겠다고 했다. 자기들 새끼니 자기들이 알아서 키우겠지 했다. 평생을 직장 다니며 다섯 사람 몫을 해내느라 나도 고단한 인생이었다. 며느리 노릇, 아내 노릇, 엄마 노릇, 딸 노릇 거기다 직장인 노릇까지 하느라 날이 흘러가는 걸 모르고 살았다. 직장 퇴임식 날, 이제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아야지 했는데 손자가 발목을 잡았다.

동창 모임이 1시에 있는데 손자 녀석을 학교에서 데려와야 했다. 1시 40분에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데려와 학원에 보내고 나니 2시. 부리나케 모임에 달려가니 2시 35분이었다.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중인데 친구 M이 손녀들 때문에 서둘러 일어나 가 버렸다. 그뿐 아니다. 3시가 넘으니 이번엔 S가 안절부절못한다. 손녀를 데리러 가긴 가야 하는데 일어서기가 싫은 모양이다. 그렇게 안절부절 10분이 지나더니 결국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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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손주가 뭔데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가. 이제는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빨리 오라 전화해도 시큰둥 끊어버리는 친구들이다. 휴대폰이 울리면 아예 받지 않는 친구도 있다. 전부 무슨 배짱인지 철갑을 두른 강심장으로 변해 가는 중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듯한 그 강심장도 손주에겐 한순간에 녹여버리고 만다. 그뿐이 아니다. 사람을 아예 전화 한 통에 서둘러 뛰어나가는 5분 대기조쯤으로 바꾸어 버렸다. 요술을 부리는 건지 마술을 부리는 건지 그 절대 권력 앞에 다들 무릎을 꿇고 만다.

말하기 쉽게 아기들이 천사 같다고 한다. 해맑은 동심에 감동하곤 한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틀림없는 말이다. 하지만 그 천사 같은 아이들이 내 팔에 안겼을 때는 전혀 다르다. 아기들은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얼마나 지독한 이기주의자인지 알게 되는데 드는 시간은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저만 바라보고 저만 챙기라 한다. 조금만 한 눈을 팔면 악을 쓰고 울어 댄다. 아니면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아이를 봐준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죄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밖으로만 돌다 이제 서야 집으로 돌아온 남편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 손자에게 눈을 맞추기 시작하는 남편도 이에 적지 않게 당황하고 만다. 자식을 기를 때, 먹여만 놓으면 저절로 크는 줄 알았던 남편이다. 그렇게 쉽게만 생각했던 사람이 아이 키우는 게 온갖 정성에다가 한시도 눈을 떼면 안 된다는 사실 앞에 어쩔 줄 몰라 한다. 그까짓 것 하다 ‘난 못 하겠다’ 소리가 저절로 나오며 손을 들고 만다. 아이 키우는 게 소꿉장난 정도로 생각했던 사고방식이 재정립되는 순간이다.

관심을 받고 사랑받은 아이가 사랑을 줄줄 안다. 사랑이 충만한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다. 아이들 가슴에 관심과 사랑을 쏟아 부을 때 사람다운 사람의 꼴을 갖추어 가는 것이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순환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사랑도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순환하는 법이다. 손자를 보면서 자연과 우주의 순환 이치를 깨닫는다. 대단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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