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3.22 10:00

보신각(普信閣) 서울시 기념물 제10호 (서울 종로구 종로2가 102번지 일대)

조선왕조 500년 도읍지 한양은 현재의 종로구와 중구 일대가 그 핵심지역이다. 광화문 사거리 칭경기념비에서 오백년 도읍지 돌아보기를 시작하였으니, 그 발걸음을 종로 쪽으로 옮겨본다.

종로(鍾路)는 말 그대로 종(鐘)이 있는 길(路)이니, 이곳에 종(鐘)을 매달아 놓은 종각(鐘閣)인 보신각(普信閣)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보신각종은 오전 4시에 33번, 오후 7시에 28번을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여러 번 화재도 겪고 몸체에 균열이 발생하여 더는 종을 칠 수 없게 된 후 지난 1985년 새 종을 만들어 달고 옛 보신각종은 은퇴하였다. 그 종이 대한민국 보물 제2호로 지금은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전시 중이다.

물론 지금은 통행금지도 없어 성문을 여닫는 종을 칠 필요도 없고, 백성들에게 종을 쳐서 시각을 알리는 시대가 아니다. 이곳 보신각 타종은 삼일절이나 광복절 등 국경일이나 해마다 송구영신 제야(除夜)의 종으로 울리는 행사용이 되고 말았지만 오백년 도읍지 한가운데 자리 잡은 번화가 종로(鍾路)의 어원(語源)이자 시작점이 된 종각(鐘閣)의 유래와 역사가 궁금하다.

보신각, 1978년에 새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큼직한 2층 누각이다. 2층 구조라면 종각(鐘閣)이 아니라 종루(鐘樓)로 불러야 맞는다는데 이미 종각으로 굳어져 새삼 고쳐 부르기도 어렵다. 멋스러운 한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원래 도읍지에 종각을 세우고 종(鐘)을 걸어 정해진 때에 울려대는 일은 고려 때부터 이어져 왔다.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태조 4년(1395)에 처음 지어진 후 4번이나 불타 없어지고 8번에 걸쳐 다시 지었다고 한다.

한양 한가운데 종을 걸고 치던 종루는 몇 번 자리를 옮겨 종로 네거리에 자리 잡았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리자 광해군 11년(1619)에 다시 지었으나 역시 화재로 타버린 후 숙종 12년(1686)에 다시 중건하였으나 고종 6년(1869)에 운종가 일대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그해 다시 짓고 1895년 3월에 고종이 ‘普信閣’이라는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 오늘까지 보신각으로 불리게 된다. 이때만 해도 보신각은 단층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였다.
대원군의 척화비가 세워졌던 곳이라는 표석

그 후 도시개발에 따라 도로확장으로 뒤로 들어 앉혔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1953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1978년에 지금의 보신각을 다시 짓게 되었는데, 도로와는 빗각을 유지한 채 더 뒤로 물러났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철근콘크리트 2층 누각을 세웠다. 고종이 내렸다는 친필 현판도 6‧25전쟁 때 파괴되었는지 현재 보신각에 걸린 편액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글씨라고 한다.

한양 천도 후 도성(都城)을 쌓을 때 유교에서 강조하는 5가지 인성 중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사대문 이름으로 배열하고 마지막 신(信)을 보신각(普信閣)에 적용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종 때 보신각 이름을 내렸다면 이 설명이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그 전에도 보신각이라고 불렀는데 고종 때 현판만 내렸다는 말인지, 그때 비로소 보신각이라고 지었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3‧1독립만세시위의 중심지였다는 표석
아무튼, 지금은 종로(鍾路)의 시작점으로 종각(鐘閣)이라는 지명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광화문광장과 시청광장에 이어 서울 시내에서 각종 집회가 많이 열리는 곳이다. 그 옛날 조선 말기에는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져 있던 곳이며,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로 4‧23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선포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보물 제2 '옛 보신각 동종(銅鍾)'

1985년 보신각을 새 종에게 물려준 옛 종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번듯한 종각을 지어 잘 모셔놓고 있다. 그러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건물 내 전시실만 둘러볼 뿐 야외전시장에 설치된 다양한 석물들이나 옛 보신각종을 알지 못한 채 지나치기 일쑤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보물 제2호 옛 보신각 동종, 건물 외관만 보면 멋져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바닥에 고임목을 설치하고 동종을 그 위에 얹어 놓았다. 모름지기 종(鐘)이란 매달려 있어야 하는 법인데 참 무지(無知)의 소치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보물 제2호 옛 보신각 동종, 건물 외관만 보면 멋져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바닥에 고임목을 설치하고 동종을 그 위에 얹어 놓았다. 모름지기 종(鐘)이란 매달려 있어야 하는 법인데 참 무지(無知)의 소치로 보인다.
보신각종은 조선 세조 14년(1468)에 만들어 신덕왕후 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다.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t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특히 종신 몸체 상면에는 보살입상이 새겨졌던 흔적을 볼 수 있어 사찰의 종을 옮긴 후 인위적으로 이 부분을 삭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조선 시대 왕실 발원 종의 자료이다. [문화재청]
덕수궁 경내에 세워진 광명문(光明門)과 그 안에 보관된 신기전, 흥천사 대종, 자격루는 아무리 보아도 이해가 안 가는 집합이다.
조선 초기 서울에는 큰 종이 다섯 개 있었는데, 첫째는 태조 7년에 주조한 大鐘이고, 둘째는 태종 12년에 만든 경복궁의 광화문 종, 셋째는 세조 4년에 주조한 경복궁의 사정전 종, 넷째가 세조 8년에 주조한 흥천사 종, 다섯째가 이 보신각종이다. 첫째, 둘째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졌고, 셋째는 흥선대원군이 당백전 제조에 사용하여 지금은 흥천사 종과 보신각종만 남아 있는데 보물 제1460호 흥천사 종은 덕수궁 경내에 놓여 있고 보물 제2호 보신각종은 국립중앙박물관 뜨락에 놓여 있다.

보신각 동종과 함께 남아있는 조선 초기 대종(大鐘) 흥천사 종은 원래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를 모신 정릉(貞陵)의 수호사찰인 흥천사의 종이었다. 태종 이방원에 의하여 능(陵)은 훼손되고 사찰도 폐사되어 대종(大鐘)만 남게 된 듯한데, 지금은 덕수궁 경내에 아무 연고도 없는 유물들과 한데 모아놓은 모양새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유물들을 모아놓은 건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함녕전의 남문 역할을 하던 광명문(光明門)이고 일제가 함부로 옮겨놓은 그대로라고 하니,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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